정해영씨의 <연인>을 읽고,
연인
유리그릇을 포개며
사이
두꺼운 종이를 깐다
"깨어져서는 안 된다'는
두툼한 생각을 밀어 넣는다
그릇과 그릇사이 부딪침없이
얼굴을 맞대며 속살거린다
'쨍그렁 하지 말고 빛나게' 라고
서로의 마음이 무작정 비치는
그 눈부신 둘레
시란 비유의 언어라고 합니다. 설명을 하거나 산문으로 나타내면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짧게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겠지요. 그래서 시는 설명이 아니라 제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뜻에서 볼 때 이 작품 <연인>은 매우 적절한 비유로 선명하게 잘 드러내고(제시하고) 있습니다.
연인이란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소중한 것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지요. 그런 뜻에서 맑고 투명하면서도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연인>을 드러내기 위한 소위 <객관적 상관물>로 가져온 것은 대단히 좋은 착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연인은 서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가능하면 하나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지요. 그러면서도 연애감정이란 대단히 섬세해서 상처받기 쉽지요. 따라서 연인사이는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조심스러운 사이이며 사랑하면서도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특수한 사이입니다. 이 양자가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서로에게 밀착하기보다는 완충의 간격을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에서 유리그릇 사이에 끼워 넣는 <두꺼운 종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꺼운 종이란 다름 아닌 <깨어져서는 안 된다는 두툼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서 <생각>이란 서로를 이해하고 염려하는 <배려>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리그릇을 포갤 때 서로 <부딪침 없이> 즉 부딪치지 않게 해서 <쨍그렁>하고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리그릇이 포개진 모습을 <작자는 얼굴을 맞대며 속살거>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들은 <쨍그렁>하고 부딪쳐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러나 상대의 존재를 실현하는, 즉 <빛나게>하는 상태를 염원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사랑이란 맹목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작자는 <서로의 마음이 무작정 비치는>이라고 말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눈부신 둘레>라고 표현합니다. 양자의 마음은 계산이나 의도가 없습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무작정 비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서로의 존재는 <그 눈부신 둘레>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짧지만 선명한 이미지 그리고 사랑의 본질을 천착하게 하는 매우 깊은 인식의 시입니다.
좋은 작품이지만 나는 다음 구절을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사족 : 제3행, <종이를 깐다>는 그 앞에 <사이>라는 말 때문에 <종이를 끼운다>가 맞을 듯 합니다. 그래야 5행의 <밀어 넣는다>라는 말과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제2련 1행, <그릇과 그릇사이 부딪침 없이>는 <그릇과 그릇이 부딪침 없이>가 맞을 듯 합니다. 부딪침은 그릇 자체가 서로 닿는 것이지, <사이>가 부딪친다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