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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소 시인의 <적멸궁에 앉아>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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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궁에 앉아
강은소

무당벌레 한 마리 와락 내 품으로 동그라졌다 바르르
다리와 더듬이를 쪼그려 떨어지더니 꼼짝 않았다

고 작고 여린 녀석을 위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그날
바람소리 시린 결 사이로 간절했던 모스부호를
다닥 따닥 딱 함부로 흘려보내 버렸을지도
억천만겁 시간을 돌아 사무치던 인연 하나를
물소리 잔 얼음장 밑으로 단단하게
단단하게 묻어 버렸을지도

꼬마남생이무당벌레 한 마리
천형(天刑)으로 숭숭 구멍 난 내 뼛속
속까지 눈바람을 채우며 얼어붙다가

파닥 딱지날개를 한 번 벌리다가 기우뚱
떨어진 다리 흩어진 살점이 저만큼 마구 뒹굴었고
나의 골짜기에서 태어나지 못했던 아이처럼
비명도 없이 굳어갔다, 점점

녀석을 위해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까 정말


--------------------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궁(혹은 적멸보궁)에 가면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은 번뇌, 열반, 해탈, 불생불멸 등의 낱말을 떠올려 보게 된다. 화자(시인)는 그러한 적멸궁에 앉아있다. 寂滅이라는 글자(원래 열반(니르바나)의 뜻이지만)가 주는 느낌처럼 매우 고요한 곳이다. 그 때 느닷없이 무당벌레 한 마리가 와락 화자의 품으로 동그라진다. 순간 섬찟한 느낌이 스친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다리와 더듬이가 바르르 떨리고 쪼그린 채 꼼짝 않고 있다. 시인도 꼼짝 않고 있다가 나중에 <고 작고 여린 녀석을 위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리라. 놀라운 장면이다. 어쩌면 시간과 공간이 함께 정지하는 모습이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별 것이 아니다. 시인이 적멸궁 안(혹은 건물의 계단 위에?) 앉아있는데, 무당벌레 한 마리가 품안에 동그라지더니 바르르 다리를 떨다가 죽은 듯이 꼼짝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면, 무당벌레 한 마리와 하필 적멸궁이라는 비일상의 공간에서 느닷없이 조우한 것은 시인에게 별 것 아닌 게 아니다. 죽은 듯이 꼼짝 않는 <무당벌레>와 <고 작고 여린 녀석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인과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별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순간 시인은 <억천만겁 시간을 돌아 사무치던 인연 하나를> <얼음장 밑으로 단단하게> <묻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생각에 이르는 것이다.

세상에 하잘 것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엄청난 인연으로 일어나고 스러지는 법임을 생각하면 두렵기 그지없다. 화자는 하필 적멸궁에서, 느닷없이 자신의 품에 떨어져 꼼짝 않는 <무당벌레 한 마리>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무당벌레의 꼼짝 않음(죽음)에 대해서 무관하며 동시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주장하지만, 그러나 시인은 곧 깊은 회의에 빠진다. 즉 시인은 언젠가 <바람 부는 그 날> 누군가가 간절하게 보내오던 <모스부호>를 <함부로 흘려보내 버렸을지도> 모르고 <억천만겁 시간을 돌아 사무치던 인연 하나를/ 물소리 잔 얼음장 밑으로 단단하게> 묻어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지금 <무당벌레 한 마리>가 꼼짝 않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그것을 <나의 골짜기에서 태어나지 못했던 아이처럼/ 비명도 없이 굳어갔다, 점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화자는 앞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마지막 구절에서 <녀석을 위해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까 정말>이라는 대단히 심각한, 근원적인 질문(회의)을 던진다. 그 질문은 이미 녀석의 죽음에 나는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 마지막 구절은 독자들의 가슴을 매우 크고 깊게 울리고 있다.


(*) 좋은 작품이지만 몇 군데 트집을 잡아본다.
우선 <적멸궁에 앉아>라는 제목이 좀 걸린다. 적멸궁의 어디에 앉아 있는지, 건물 안에 앉아있는지, 건물 밖에 있는지 <앉아>라는 말 때문에 애매하게 보인다. 예컨대 그냥 <적멸궁에서>라고 그런 의문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크고 막연하고 안이해 보인다. 한정어를 하나 붙이면 낫지 않을까?
그리고 본문에서는 1련, 2련 그리고 마지막 련(6련)에서 드러낸 겉말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3련, ,4련, ,5련의 속말은 좀 애매하게 보인다. 예컨대 3련에서 <모스부호>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누군가가 화자에게 모스부호를 간절하게 보내왔는데 화자가 그것을 <함부로 흘려버린> 것인지, 모스부호의 발신자가 화자였는지 애매하다. 만일 화자가 수신자였다면 그는 모스부호 소리(다닥 따닥 딱)를 내지 않을 테니 이상하고, 화자가 발신자라면 그 다음에 나오는 <억천만겁 시간을 돌아 사무치던 인연 하나를> 묻어버리는 것과 의미상 연결이 무리해 보인다.
또한 4련의 <꼬마남생이무당벌레 한 마리>와 1련의 <무당벌레 한 마리>는 어떻게 상관되는지 애매하다. 왜 갑자기 <꼬마남생이무당벌레>가 내 뼛속 눈바람을 채우며 얼어붙는지, 그리고 5련에 연결되어 <파닥 딱지날개를 한 번 벌리다가 기우뚱/ 떨어진 다리 흩어진 살점이 저만큼 마구 뒹굴었>는지 이상하다. 이 장면은 화자(시인)의 의식 속에 들어있는 개인적 경험을 묘사한 것일 터인데 그것을 독자가 알아차릴 수 있게 해 주는 암시나 선행이미지가 없어서 다소 무리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명료하게 정리한다면 이 작품의 뛰어난 발상이나 강한 주제의식이 잘 살아나서 퍽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 강은소씨, 캐나다에서 적멸궁을 쓰다니 재미있습니다. 새해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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