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엔가 나는 물빛 사이트의 <정겨운 속삭임>코너에서 신상조의 작품 <침묵>을 읽고 다음과 같이 메모를 해 둔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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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상조의 작품 <침묵>을 읽으면서 김명수의 유명한 작품 <월식>을 연상했다. 그 작품은 이러하다.
월식(月蝕)
김명수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월식>의 설명을 배제한 묘사 뒤에서 우리는 어떤 비극적 서사를 상상한다. 묘사의 행간이 넓어서 상상의 공간이 크다.
신상조의 <침묵>도 유사한 느낌이 든다. 그것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침묵
신상조
일행의 발소리가 달의 숨을 죽였다.
우물의 노래 그쳐,
목이 말라 가슴을 쳤다.
뻥, 뻥, 구멍이 뚫렸다.
남은 연민 한 잎, 계수나무를 뒤로,
작은 주민들은 집을 비웠다.
소리 없이,
달이 메마르고 창백하다.
그 날 이후,
벨은 울리지 않았다.
사랑은 상심의 옷을 걸어둔 채 외출했다.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전자처럼 그 서사적 세계가 잘 이룩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제 2련의 내용이 작자만 알고 있는 암호 같아서 독자는 건너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우물의 노래 그치고,/ 목이 말라 가슴을 쳤다./ 뻥, 뻥, 구멍이 뚫렸다.>라는 구절은 무슨 뜻인지 앞 뒷말을 연결해보아도 알 수가 없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독자는 시인이 놓아둔 이미지의 돌멩이를 건너갈 수 있어야 하는데 돌과 돌 사이가 너무 멀거나 일정한 방향(논리) 없이 어지럽게 놓여있다면 독자는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독자를 의식해서 너무 친절하게 설명하듯 하면 산문이 되어 답답하지만 작자만 알고 있는 암호라면 형상화되지 못하여 시작품으로 완성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작자는 징검다리의 돌의 간격을 절묘하게 떼어놓아야 한다. 이 거리가 시적 긴장을 주는 것인데 지나치게 멀면 긴장의 줄은 끊어져서 마치 줄이 끊어진 연처럼 작품은 추락해버리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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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나는 조금 느긋하게 물빛 사이트의 <정겨운 속삭임>을 읽다가 그 작품에 대한 <딴죽>의 비판(16695번글, 2004/06/15)과 그것에 대한 <착한 여자>의 해명(16711번 <아래의 글이 너무 밀려서>2004/-6/15일자)을 읽고 나는 놀랐다. 나는 전혀 다르게 읽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에 대해서 독자와 작자가 이렇게 빗나갈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은 곧 허탈감으로 다가왔다. <착한 여자>에게 나는 그의 작품 <침묵>을 읽은 독자(아무런 선입견 없이 처음으로 이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가 여기 나타난 이미지만 가지고 암스트롱이 달에 내렸던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전혀! 여기 나타난 이미지만 가지고는 나는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자(착한 여자)와 독자(나) 사이에는 전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작자가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일행>: 루이암스트롱 일행
<달>: 달
<우물><우물의 노래>: 분화구인데요 예전에 달 착륙이 있기 전에는 토끼가 물긷는 우물로 상상했지요.
<계수나무>: 달이 신비감을 상실한 뒤 우리에게 겨우 연민정도의 감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연민 한 잎을 사용했었다.
<주민들>: 작은 주민들은 토끼를 비유한 거였었다.]
이러한 건너기 힘든 간격에 대해서 작자와 다음 모임 때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