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버스 앞자리 노인이 닮았어요
희끗한 파마머리, 꼿꼿한 앉음새까지
하늘 쪽문 열어보세요
엄마는 내게 가장 슬픈 명사라는 거
나는 영원히 '새끼'라는 거, 늙어 꼬부라져도
곁에 갈 때까지 끝까지 투정부릴 거
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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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조씨는 이 작품을 <돌아가신 친정엄마를 생각하며> 쓴 것인데 <작품성에 관계없이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며 평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자는 <작품성>에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특별히 애착이 가는 것이 있습니다. 소위 작품성이라는 것, 객관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작품들은 분명히 내재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지요. 그런데 그러한 작품성과 관계없이 어떤 특정한 작품에 작자가 애착을 갖고 있다면, 그 속에는 <애착을 가질 만한 요소>, 어쩌면 작자의 가장 절실하고도 진실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일 터이고, 예민한 독자라면 그것을 눈치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이 작품은 작자의 특별한 애착의 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간절하고 소중한 어머니에 대한 눈물나는 감정이지요. 짐작하건대 이 작품의 제목을 <편지>라고 한 것은 작자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하고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화자는 버스 안에서 문득 앞자리에 앉아있는 한 노인(노파)과 마주칩니다. <버스>는 서민대중들의 교통수단입니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은 자가용을 타는 일이 흔하지만 평생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버스에서 짐짝처럼 흔들리며 신산(辛酸)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화자의 눈에 들어온 그 노인의 <희끗한 파마머리, 꼿꼿한 앉음새>에서 화자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가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 <꼿꼿한 앉음새>가 보여주는 바처럼 품격과 자존심을 지켜오신 분입니다. 순간 형언키 어려운 어떤 감정의 응어리가 가슴을 메이게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가장 깊고 진한 슬픔이거나 그것과 유사한 아픔입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엄마>라는 호칭은 철없이 응석부리고 투정하는 어린애에게 한없이 포근하고 따뜻한, 세상의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영원하고 전능한 이름입니다. 누구든지 아무리 나이를 먹고 키가 자라 어른이 되고 심지어는 <늙어 꼬부라져도> 그녀를 <엄마>라고 부를 때면 그는 마치 <어미> 젖가슴에 매달려 자신의 존재를 통째로 의지하는 어리고 작은 <새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화자는 버스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서 문득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머니가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새삼 가슴이 미어지고 슬픔이 솟구칩니다. 그리하여 화자는 마음 속으로 간절하게 하늘에 가신 어머니에게 <하늘 쪽문 열어보세요>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온 몸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투정을 쏟아냅니다. <엄마는 내게 가장 슬픈 명사라는 거/ 나는 영원히 '새끼'라는 거, 늙어 꼬부라져도/ 곁에 갈 때까지 끝까지 투정부릴 거//아셨어요?>
그렇습니다. 온갖 신산과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꼿꼿한 앉음새>를 잃지 않으셨던 어머니, 그리고 함부로 투정하고 불평하던 자식을 한없는 사랑과 부드러움과 포근함으로 감싸주던 영원한 모성의 호칭, 그러므로 그분을 떠올릴 때 우리는 안타깝고 아프고 슬퍼집니다. 과연 <엄마>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명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자는 이제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강요하듯 물어봅니다. <...... 아셨어요?> 어른이 되어 눌러왔던 감정을 쏟아낸 후 자신의 전 존재를 <어머니>라는 위대한 모성을 향해서 질문하듯 던지는 것이지요. 그것을 화자는 <편지>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사족: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많은 말을 과감하게 생략했기 때문에 읽고 난 후에도 독자의 마음 속에 시적 긴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자가 염려하는 것처럼 작품의 완성도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토론 시간에 얘기합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자의 진실한 감정이 바탕이 된 것이 강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