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여다본다
김상연
시골길을 가다 보면
무덤과 마주칠 때가 있다
사람들 내왕이 뜸한 길가나
산비알 야트막한 구릉지
오며가며 인연 닿은
무덤들 가운데는 간혹,
생전에 다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 보따리 하나쯤
이승 어디에 숨겨두었을 법한
마음이 가는 무덤도 있다
그럴 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덤을 들여다본다
둥글게 뭉쳐진
한 사람의 생이
툭, 툭, 만져질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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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시인의 시와 그에 대한 이도원씨와 서경애씨의 짧은 감상문도 잘 읽었습니다. 좋은 작품이라는 데 공감합니다. 나는 시골에 살고 있는 이 시인을 시적으로 부러워합니다. 토론회 때 종종 그가 보여주는 시골이미지와 토속어가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두 군데 표현에서 나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1. 이 시에서 화자의 가장 중요한 행위를 나타내는 <들여다본다>라는 표현에 대한 것입니다. "들여다본다"는 말은 바깥에서 안쪽을 보는 것이고, 어떤 작은 사물에 눈을 가까이하여 자세히 보는 것, 즉 영어로 표현한다면 look in 혹은 look into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무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두 가기 경우, 즉 무덤에 구멍이 나서 속을 들여다보거나, 무덤이 가령 도토리처럼 작아서 눈을 가까이 하여 자세히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무덤은 우선 물리적으로 모양이나 크기가 <들여다본다>는 말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컨대 <빈 상자 속>이나 <자동차 안> 혹은 <깨알같은 글씨>는 들여다보지만 <건물의 지붕>이나 <언덕> 혹은 <산>은 들여다보지 않고 바라보거나 살펴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도원씨는 그 점을 <무덤 속의 망자의 슬픈 넋을 들여다보는 행위>라고 아주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용상으로는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그에 앞서서 우선 표현상 무리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작자의 탁월한 표현대로 <생전에 다 풀어내지 못한/이야기 보따리 하나쯤/ 이승 어디에 숨겨두었을 법한/ 마음이 가는 무덤>도 있어서, 그리고 <둥글게 뭉쳐진/ 한 사람의 생이/ 툭, 툭, 만져질 것만 같아>서 그러한 <한 사람의 생>의 흔적을 찾아보는 행위라면 물리적으로 그것은 무덤의 겉을 자세히 보는 것이므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살펴본다>가 더 옳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둥글게 뭉쳐진 한 사람의 생이> <만져질 것> 같은 것이라면 더구나 <들여다본다>는 시각적인 표현보다는 <건드려본다>거나 <만져본다> 혹은 <쓰다듬어본다>는 촉각에 기대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우리 토론회 때 늘 주장합니다만, 이미지는 감각적인 것이고 그것은 물리적으로 타당한 것입니다.
2. 같은 문맥에서 <툭, 툭, 만져질 것만 같아>라는 표현입니다. 풋풋하고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감각을 확장하고 새롭게 전환하는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감동의 핵심은 리얼리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표현은 <감각을 확장시키는 의도>가 돋보이지만, 동시에 작위적 표현(억지스러움)이기도 해서 리얼리티를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툭, 툭,>이란 아주 짧게 부딪치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발로 툭, 툭, 걷어찬다>든지,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 툭, 치며 지나간다>는 등의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작자는 <툭, 툭,>이라는 짧은 부딪침이나 건드림을 <만진다>는 동사를 꾸미게 합니다. 낯설어서 새롭고 재미는 있지만 그만큼 작위적이어서 진실성은 감소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물리적으로 <툭>의 시간에는 치거나 건드릴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시가 예술작품으로서 리얼리티를 드러내려 한다면, 작위적인 것은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