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노을
-2商
울고 있구나
산 어깰 짚고 오르는 노을이어
산이 높아 우는가
흐느끼는 어깰 쓰다듬으며
나의 사랑처럼 울고 있구나
죄처럼 드러누워
허무처럼 흐르는
나의 산
노을 휘감으면
감길수록 살저며 깊이 우는
그대 나의 산이어
그대 나의 노을이어
내 죽기로 사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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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저미는 아름다운 작품 잘 읽었습니다. 산과 노을이라니.... 산은 땅(대지)의 돌출부분이고 노을은 하늘의 한 모습입니다. 땅과 하늘은 늘 맞닿아 있으면서도 늘 서로를 그리워하는 듯한 몸짓들을 하고 있지요. 땅은 하늘을 향해 일어나서 산이 됩니다. 하늘은 땅을 바람과 구름으로 혹은 비와 햇살로 쓰다듬고 적셔주고 감싸줍니다. 해질 무렵이면 노을 빛으로 물들게도 합니다. 하늘(노을)과 땅(산)이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지금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저 산을 휘감아 흐르는 노을과 그 노을 빛에 상기된 산의 어깨가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아름다운 장면을 울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시인의 서정이 지금 아픈 사랑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울음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슬픔은 우리들의 가장 순수한 감정이어서, 그것이 산을 감싸고 있는 노을로 형상화된 것을 보니 독자들도 슬픔에 전염되어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런데 나는 이 아름다운 시를 읽으면서 작지만 혼란을 느낍니다. 그것이 독자로서의 작은 불만입니다. 문학작품에서 감동을 주는 요소를 리얼리티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선 논리적으로 맞을 때 나타납니다. 그런데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1련과 2련을 읽어보면 울고 있는 것은 노을입니다. 노을은 산의 어깨를 짚고 올라가면서, 산이 높은 까닭인지 하여튼 <울고> 있습니다. 노을이 <흐느끼는 (산의) 어깰 쓰다듬>고 있다고 하니 산도 역시 울고(흐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1련 1행의 <울고 있구나>의 주어를 <산>으로 상정해 보면, 당장 2련에서 걸립니다. <흐느끼는 어깰 쓰다듬으며/ 나의 사랑처럼 울고 있구나>라고 했으니, 어깰 쓰다듬는 것과 우는 것은 동시동작이므로 주어는 (산의) <어깰 쓰다듬>는 <노을>로 봐야 합니다. 따라서 1련의 울고 있는 주체도 자연스럽게 노을처럼 읽힙니다. 즉 1-2련을 풀어보면 <산의 어깨를 짚고 오르는 노을이여, (너는) 울고 있구나, 산이 높아서 우는 것이냐, 흐느끼는 (산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의 사랑처럼 (너는=산) 울고 있구나>가 됩니다.
그리고 제4련의 <노을 휘감으면/ 감길수록 살저며 깊이 우는>이라고 했으니 여기서 우는 것은 노을이 휘감을수록 <깊이 우는 산>입니다. 그러므로 5련의 마지막 수식어 <깊이 우는>에 걸리는 것은 (노을에 휘감겨 우는) 산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대 나의 산이어/ 그대 나의 노을이여>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앞의 에피세트를 노을에 붙여봅시다. <노을 휘감으면/ 감길수록 살저며 깊이 우는> <노을이여>가 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노을이 노을을 휘감을 수는 없으니까요.
일단 다시 정리해 보면, 제2련에서 울음의 주체는 <노을>로 보이는데, 제4련에서 그것은 분명히 <산>으로 나타나니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어 혼란이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산과 노을을 함께 아우르기 위해서 제 5련에서는 양자를 다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방금 지적했던 것처럼 노을이 노을을 휘감는 무리가 따릅니다. 이렇게 얼핏 보아서는 그냥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모순된 부분(논리적으로 걸리는 부분) 때문에 저는 약간 불만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죄처럼 드러누워/ 허무처럼 흐르는 산>이 <노을에 휘감겨> 울고 있는 장면은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그러한 산을 <죽기로 사랑하>고 있는 시적 화자(시인)의 심경 또한 얼마나 처절하도록 아름답습니까? 그러한 심경이 독자들에게 무리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전해질 때 이 시는 문자 그대로 가작이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