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김세현
사랑에 목말라 본 자만이 안다
갈구만 하다가 깨물어 버린 입술 같은 것
헛손질 마구 피어나던 그늘
가슴에만 품어야 했던 꽃
한 생애
시퍼렇게 피 흘리던 아픔이
메마른 몸을 열어
붉은 혓바늘로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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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는 봄에 일찍 돋아난 잎이 완전히 시들어 떨어진 후 꽃대가 올라오기 때문에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는 꽃이 피지 않으므로 꽃은 잎을 생각하고 잎은 꽃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요. 서로 만날 수 없기에 그리움은 더욱 커지는 것, 그 심경은 진정으로 <사랑에 목말라 본 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을 종종 상사화에 투영해서 노래하는 모양입니다.
릴케는 시를 체험이라고 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되지 않는 것, 오직 체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노자 선생의 道可道 非常道처럼 사랑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인은 단호하게 사랑은 "사랑에 목말라 본 자만이 안다"고 말합니다. 즉 사랑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오직 <목말라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갈구>입니다. 마치 상사화의 잎과 꽃의 관계처럼 서로 그리워만 할 뿐 만날 수도 이룰 수도 없는 부재의 공간인 <그늘>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인은 서로 <갈구만 하다가 깨물어 버린 입술>처럼 어이없이 <헛손질>로 <마구 피어나던 그늘>이라고 노래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헛손질로 피어나는 그늘>이라니.... 사람들은 흔히 얘기하는 <사랑의 부재>란 바로 헛손질로 피어나는 <그늘>이 아닐까요? <그늘>이야말로 잡을 수 없는 혹은 잡히지 않는 부재의 공간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오직 <가슴에만 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시인이 말처럼 <한 생애/시퍼렇게 피 흘리던 아픔이/ 메마른 몸을 열어/ 붉은 혓바늘로 돋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실제로 상사화는 잎이 다 시들어 떨어진 후에 꽃이 핀다고 하니 <메마른 몸을 열어/ 붉은 혓바늘로 돋는>이라는 표현이 절묘하게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아픔 혹은 안타까움은 마치 우리 몸의 가장 예민한 감각덩어리인 <혀>에 <붉은 혓바늘>로 돋아서 자신을 찔러 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상사화의 색깔이 붉은 혓바늘을 연상시키는 홍자색이라는군요.
(사족)
그런데 이 시에서 제 4련의 <가슴에만 품어야 했던 꽃>이라는 구절이 직설적이어서 재미가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상사화를 <꽃>이라고 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가슴에만 품어야 했던 꽃>을 <가슴에만 품어야 했던 말> 정도로 조금 돌려서 표현하면 어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