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썼던 독후감을 오늘 읽어보니 생각이 짧고 잘못 된 것 같아서 사족을 붙입니다.
식물의 <가시>는 식물의 생리로 보아서도 <방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동물이 가지고 있는 가시, 예컨대 고슴도치의 그것도 방어용이지요. 더 확대하면 초식동물의 <뿔>도 그렇구요. 그래서 나는 가시연의 가시도 <방어용>이므로 적극적인 공격적 감정인 분노가 아니라 수동적인 <인고>가 아니냐고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니 순전히 <인고>로서 수동적인 방어만을 고집한다면 거북이의 갑옷처럼 두꺼운 껍질이면 되지, 왜 상대방을 위해할 수 있는 날카로운 가시인가 하는 점이 남지요. 그러나 이것은 전체를 잘 모르고 단순하게 논리만 고집했던 나의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가시연>의 생리를 잘 알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을 <저 온갖 적의와 자해의 시간이 오래 무더웠겠다>고 읽었던 문인수 시인이나 가을이 되자 아득한 물 위에 가시만 남겨두고 잎은 다 녹아버린다고 썼던 이동순 시인의 작품을 길잡이로 금이정씨의 <가시연>을 다시 읽어보니 어제 나는 바르게 읽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한없는 분노와 용서 적의와 사랑의 되풀이임을 생각해 보니 그러한 감정들의 변증법적인 지양이 드디어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가시연꽃 구경을 가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