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즉물적인 존재(사물)를 의미의 공간에 불러내어 인간화 해서 그것과 만나고 대화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뜻에서 눈은 사물을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사물과 만나는 것이구요.
금이정씨는 <가시연>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깊이 있게 읽어냅니다. 우리는 이 시인의 삶의 해석의 깊이를 두렵게 느낍니다. 연은 호수가 늪지처럼 <얕보면 빠져드는 진구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세계가 바로 그러하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진구렁에서도 그러나 연의 잎과 꽃은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연꽃을 자주 은유로 사용해 오는 것 같습니다.
<고여 있어도 흐르는 늪지의 물은 그의 마음이란다. 부글거리다 지쳐 썩어 내린 퇴적물, 세월이 흐르면 스스로를 淨化한단다.> 만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합니다. 그러므로 <고여 있>는 늪지의 물도 결국은 <부글거리다 지쳐 썩어내린 퇴적물>이 되겠지요. 다시 말하면 <마음>도 부글거리고 썩어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말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스스로를 淨化>한다구요. 이 시인은 세상의 변화와 덧없음 속에서도 결국은 스스로를 정화하여 지키는 <마음>이라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분노>를 말합니다.
나는 이 시인이 말하는 분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솟구치는 분노>가 <무기>가 된다는 해석은 너무 당연합니다. 무기는 남을 위협하는 도구이고 분노는 남에 대한 공격적 감정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분노는 대체로 내가 받은 위협에 대한 반격의 심리(공격성)이므로 공격적인 무기이겠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 가시연의 <가시>를 <분노>로 본 것은 어떤가요? 가시연의 가시는 타자로부터 오는 위협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가 아닐까요? 작자도 그러므로 그것을 <날카로운 창칼로 직조된 그의 갑옷>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갑옷이란 수동적인 방어용의 무기일 뿐 공격성(분노)과는 다르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방어의 수단을 <분노> 즉 공격성과 결부시키는 것은 조금 무리해 보입니다. 차라리 가시연의 가시는 밖으로 향한 나의 <분노>의 표출이라기 보다는 적의 접근을 막겠다는 방패와 같은 것이므로 <인고>의 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일 뿐이므로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닐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