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현의 <격포-달밤>은 서해안의 항구 격포의 달밤을 관능적인 이미지로 형상화 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관능적인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대단히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지요.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은 예술가라는 독특한 개성을 통해서 예술작품으로 태어납니다. 대상이 사실이라면 작품은 그것이 예술가를 통해서 인간화된 진실입니다. 진실,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리얼리티라는 것이지요. 시인은 그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눈을 맑게 씻고 사물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 때 만일 시인이 솔직하지 않게 다소 과장하거나 거짓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직관으로 알아차리고 외면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감동을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해서 과장하거나 포장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쓸 데 없이 수식어를 남발하게 되고 허풍을 떨거나 거짓말을 하게되는 것이지요.
나는 이 작품이 일단 격포라는 항구의 달밤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장점은 일단 접어두고, 몇 가지 리얼리티를 해치는 표현들을 지적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 <물빛> 홈페이지의 <작품을 읽고>라는 코너가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우리끼리 칭찬하는 물빛의 안방이 아니라 서로 신랄하게 쓴소리를 하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열린 마당으로 발전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1). 이 시는 첫 구절부터 강력한 관능적 흡인력을 가지고 독자의 시선을 끌어 당깁니다. 그런데 하늘이 바지 끈을 풀고 수정나무 숲을 지나가는 이미지는 어딘가 무리해 보입니다. 이미지란 것은 물리적인 형태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하늘이라는 끝없는 공간, 달리 말해서 지상을 다 덮고 있는 그 무한의 공간이 다시 작은 공간인 숲을 지나 이동한다는 것은 무리하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여우가 숲을 지나간다거나 달이 하늘을 지나간다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반대로 숲이 여우를 지나간다거나 하늘이 달을 지나간다는 것은 무리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2) <하늘은 한껏 바지 끈을 풀고/ 수정나무 숲을 지나/ 백련 무늬들이 수놓인/ 바다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이 구절에서는 하늘이 바다 위에 몸을 뉘었다는 것인데, <하늘>, <바다>는 그 자체로 아키타입(원형상징)의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수정나무 숲>이나 <백련 무늬들이 수놓인> 등으로 수식된 이미지는 예컨대 잘 생긴 신부에게 너무 요란하게 화장품을 발라놓은(?)듯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백련무늬들이 수놓인> <바다침대>는 작자의 특별한 개인적 경험이나 상상이어서 독자들에게는 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이미지들의 화려함이 리얼리티를 훼손시키는 것 같습니다.
(3) 그리고 시는 은유적인 언어라고 하지요. 그 은유는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 거리를 건너가는 재미를 느낍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너무 직설적인 (은유와 내용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표현들이 독자들의 상상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열려져... 뒤척이는> <여인의 나신들> <투명한 속내> <허벅지 내놓은> <방사하는 달무리>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너무 노출이 심하면 오히려 아름다운 관능미가 훼손될 수도 있는 것처럼,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너무 직설적인 표현에 의존하면 자칫 포르노그라피로 떨어질 위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