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지님의 <동행>을 읽고,
요즘 문단의 일각에서는 고 미당 선생에 대하여 비판과 옹호의 논쟁이 뜨겁습니다. 문학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입장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요. 시와 시인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구체적으로 말해서 시와 시인을 따로 떼어 볼 수 있느냐, 아니냐? 혹은 시의 영향이 사회에 직접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컨대 예술이 인생을 위한 예술이냐 예술을 위한 예술이냐 하는 낡고 오래된 논쟁도 같은 맥락이 되겠지요. 그래도 공자 선생님의 詩三百이면 思無邪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 동양적인 문학관은 시와 인간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도 예술작품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예술작품의 근원은 예술가이고 예술가의 근원은 다시 예술작품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간단하게 시와 시인을 떼어놓고 얘기할 수 있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요즘 미당에 대한 논쟁은 그의 <역사의식>에 관한 것인 듯 한데, 시인에게는 정치가나 경제인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를 꿈꾸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탈레스가 발을 헛디뎌서 개천에 빠졌을 때 그를 끌어올려 준 노파와 나눴던 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줍니다. 탈레스가 별나라 일을 생각하느라고 발을 헛디뎌 실수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가까운)발 밑에 일도 모르면서 (멀고먼)별나라 일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이냐고 했던 노파의 말은 탈레스와는 차원이 서로 다른 것일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지금 이런 얘기를 쓰고자 하는 게 아닌데 말이 길어졌습니다. 늘 정정지 님의 시를 읽을 때마다 어쩌면 이분은 이렇게 시와 인간이 하나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두가 길어진 것입니다. 20년 가까이 정정지님의 시를 읽어왔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시와 인간이 합치된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요? 글이 곧 인간이라는 우리 동양적인 문학관을 정정지님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십 여 년 동안 세상의 풍상을 겪으셨을 텐데, 며느리도 맞고 손자도 보신 분이 그렇게 때묻지 않고 청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역설적으로 이분의 시는 너무 착한 어린이의 착한 행동 같아서 때로는 융통성 없이 답답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피가 나도록 찢고 부수고 비틀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만, 사실은 읽고 돌아서면 누구든지 정정지님의 글을 좋아하게 되지요.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시와 인간, 말과 행동의 일치,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진정성이 그대로 문면에 살아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작품 <동행>을 읽으면 우리들(독자)은 저런 분(시적 화자=작자)의 며느리가 되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해심이 깊고 따뜻하며 상대방을 믿어주고 자상하게 배려하면서 나름대로 강한 의지도 보이고, 며느리와 함께 함을 기뻐하는 시어머니의 사랑과 신뢰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쉬운 말로 편안하게 아주 소중한 것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