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올리시는 시 덕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대화를 주고 받은 적은 없지만, 어떤 분인지 미루어 짐작이 갈 정도로 개성있는 시들이었습니다.
큰 강의 시원이 되는 깊은 산 기슭의 맑은 물처럼 투명한 시들이었지요. 하지만 맑고 고운 글이었지만 무언가 자꾸만 허전하다는 느낌,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어 왜, 무엇 때문일까 오래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원의 맑은 물도 언젠가는 세상을 돌고 돌아 큰 강이 되고 바다가 되겠지요. 세상의 오물을 가득 품고 있지만, 근원인 대양으로 가려면 아래로 흐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 뜰 앞에 한 그루 나무가 있다 합시다.
우리는 그 나무의 잎과 가지를 보고 그 뿌리를 짐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잎과 가지 그 겉모습만 보고 뿌리를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뿌리가 땅 속에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짧은 안목 탓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무를 전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잎과 가지에 나타나 있는 뿌리의 정신을 볼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일 테지요.
하지만 나무는 스스로 제 뿌리를 보여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나무 자신만의 은밀한, 사적인, 내면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또한 나무를 볼 때 뿌리까지 캐내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에서 나타나 보이는 <서경애라는 이름의 나무> 의 뿌리는 깊고 단단합니다. 우리는 글에서 누구나 그것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 <자아>, <절대적 존재와의 교감>, 이라는 뜻이나 단어들은 오직 땅 속에 깊숙히 내장되어 있어야 할 뿌리 같은 것들이 아닐까요? 글이란 뿌리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의 힘을 근원으로 하는 줄기와 잎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시를 읽을 때마다 어딘가 불편하다는 느낌은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뿌리를 걸우지 않고 보이는 잎과 가지만 속성으로 키워서 보이려는 사람들이 요즘은 많지요. 그런 면에서 <서경애라는 나무>는 얼마나 자신과 치열하게 대면하고 있으며 얼마나 진실하고 정직하게 사시는지 글을 보면 짐작이 갑니다. 든든합니다.
하지만 이제 잎과 가지를 보여 주세요. 자신의 내면 깊숙히로만 드리워진 사다리, 이젠 그걸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셨으면 하는 마음에 건방지게도 이런 글월 올립니다. 왜냐하면 나무는 잎과 가지 그리고 꽃과 열매로서 그 존재가치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뿌리의 깊이만큼 줄기의 높이로 솟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경애라는 나무>, 무성하고 아름다운 한 그루 나무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