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국을 고며 /신상조
노동을 앗긴
푸등한 꼬리가 토막져 있다.
그 옛날 들판에선 결곡했을 뼈 속에
스민 핏빛 욕정을 우려낸다.
마음자리 어디에
이다지도 속속들이 채워져 있었을까
걷어내고 또 걷어내도
소문처럼 떠오르는 기름진 위선
얼마나 더 뜨겁게 하루를 살아야
얼마나 더 간절히 마음을 졸여야
곱다시 남을 수 있을까
뽀오얀 진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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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조씨, 토론회 때 가져왔던 것과는 달라진 <대단한 작품>이 되었네요. 어떻게 하루만에 이렇게 고치셨는지 궁금합니다.
<곰국를 고>는 것은 그야말로 뼈 속의 엑기스를 고스란히 고아내는 일이지요. 모든 쓸데 없는 것들을 걷어내고 마지막에 남는 <진국>, 사소한 일상성에서 진정한 본래성을 찾아내려는 작자의 사색과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대단한 경이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이 바로 시인의 눈이지요. 예를 들면 <곰국> 뿐이겠습니까? 설거지를 하며, 나물을 다듬으며, 사과를 깎으며, 걸레를 빨며, 전화를 받으며...... 시인의 눈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놀라운 삶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겠지요. 그런 뜻에서 詩人은 보는 사람(視人)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카프카는 알키메데스적 원점에 서 있는 작가>라는 엠리히의 말을 가지고 다음 토론회 때 얘기하겠습니다.
작자는 지금, 곰국으로 고고 있는 <토막진> 소의 <꼬리>에서 <그 옛날 들판에선 결곡했을 뼈 속에/ 스민 핏빛 욕정을>읽어내면서, 그 <뼈 속>을 자신의 <마음자리>로 환치하여 세속화 된 위선을 <뜨겁게> 혹은 <간절히> 걷어내고 그야말로 <진국>이라는 본래적인 삶의 모습, 다시 말해서 자신의 <존재실현>을 염원합니다. 그러한 염원이 <곰국을 고는> 평범한 일상행위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어서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 쉽게 다가옵니다.
시인은 언어의 파숫군으로서 언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작자는 이 작품에서 <푸둥한> <결곡하다> <곱다시> 등 흔하지 않은 낱말을 찾아 쓰고 있는데 그러한 노력은 매우 값져 보입니다. 그런데 너무 의식적으로 사용한다면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위의 낱말을 사전을 찾아 확인했습니다. <푸등한>이란 말은 아마 <푸둥푸둥>이라는 부사를 작자가 임의적으로 <푸등한>이라고 변형시켜 형용사로 쓴 것 같은데, 그렇다면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1련을 한 행으로 해서 시각적인 효과와 의미의 강화 그리고 긴장의 조성 등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만, 의미상으로 2련의 1행까지 연결해서 1련으로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마지막 행을 독립된 연으로 쓴 것은 의미상으로도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첫 행을 독립된 연으로 만든 것은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그대로 효과가 있으니 고치라는 말은 아니고 좀 더 고민해보시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