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지님의 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에 대하여, > 작품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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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지님의 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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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정정지)


희미한 내 불빛이
쓸쓸한 밤바다 표류하는
너의 길잡이 될 수만 있다면
밤 새 칭얼대는 저 파도 얼르며
비 바람 몰아쳐도 그렇게 서 있겠네

곱잖은 내 목소리가 네게
자장가 될 수만 있다면
너의 피곤 거둬 실은 마차가 사라질때까지
노래하겠네

내 가슴에
무너지듯 안겨오는
네 지친 영혼
깃털 이불되어 안을수 있다면

낙타도 없이 사막을 걷는 네게
한 모금 샘물 될 수만 있다면

아아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


낮은 목소리의 들릴 듯 말 듯 들려오는, 진정한 사랑의 독백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건네는 말보다 더 감동적이고 울림이 깊은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경험 말입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그렇게 낮은 음성으로 들릴 듯 말 듯 혼잣말하는 소리가 우리들의 가슴을 깊게 울려옵니다. 시인의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실려있기 때문이지요. 그야말로 피곤에 지친 <너>가 헤매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안쓰럽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우리에게 건너와 감동을 줍니다.

상상컨대 아마도 시인은 지금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 예컨대 자식이 성장해서 자신의 품을 떠나 세상에 나가 힘들고 어려운 항해를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합니다. 품안에 있을 때와는 달리 이제 <너>는 독립된 존재로서 자기실현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나 아직도 어리고 약해 보이는 <너>에게 현실이라는 바다는 너무나 가혹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거친 세상에서 표류하듯 걸어가는 <너>를 생각하면 한없이 가슴이 저립니다. 그러한 심경을 시인은 낮은 음성으로 들릴 듯 말 듯 독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화자)>는 지금 어두운 밤바다를 표류하고 있는 <너>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을 희생해도 좋으련만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도와 줄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피상적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은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본질적인 것들, 예컨대 죽음과 고독 혹은 고통과 두려움 같은 것들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근원적으로 외롭고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나의 존재가 미약하듯 내 불빛은 너무나 희미합니다. 그럼에도 <너>가 나의 희미한 불빛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나의 나약한 존재(희미한 불빛)가 너에게 위안이 되고 길을 비춰주는 불빛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밤 새 칭얼대는 저 파도 얼르며/ 비바람 몰아쳐도 그렇게 서 있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죽어도 좋겠다느니 혹은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말보다 약해 보이지만 더 진실하게 울려옵니다. 심리적인 겸손과 절제 그리고 진실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너>는 오랜 표류 끝에 대단히 피곤해 보입니다. 그래서 <너>를 바라보기가 매우 안쓰럽습니다. 너를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비록 목소리가 곱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너>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수 있다면 <너의 피곤 거둬 실은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노래하겠>다고 합니다. <자장가>란 게 무엇입니까? 낯선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의 위협 앞에 노출된 아기에게 평화를 주는 가장 포근한 안식의 소리가 아닙니까? 너를 위해 불러줄 수 있는 자장가, 그 모성의 노래로 감싸주고자 하는 화자의 사랑이 다가옵니다.

세파에 시달리며 표류하다가 <너>의 영혼이 <무너지듯> <나>의 가슴에 안겨 올 때, 그 때 <내>가 <너>의 전 존재를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깃털 이불>이 될 수 있다면..... 이 간절한 소망이 가슴이 저리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치 <낙타도 없이 사막을 걷는>듯한 너에게 내가 <한 모금 샘물 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너의 갈증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너와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너는 나를 떠나서 너의 길을 가야 합니다. 네가 가는 길은 파도치는 어둠의 바다와 같고, 방향을 알 수 없는 막막한 사막과도 같습니다. 그런 세상에 너를 내 보내고 나는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네가 만나게 될 어둡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들..... 그래서 때로는 길을 잃어 헤매고 지쳐서 쓰러지기도 하는 너를 지켜보면서도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마치 아직 잘 날지도 못하는 새새끼를 둥지 밖으로 내보내 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어미 새의 심경과 같다고나 할까요? 안타깝고 불안해서 견디기가 힘든 심경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 시인의 그런 심경이 고스란히 우리 독자들에게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것이 이 시가 주는 감동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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