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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는 여자의 희망 찾기 --「보리사, 지워진 여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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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는 여자의 희망 찾기
----- 「보리사, 지워진 여자」를 읽고

뭐니뭐니 해도 소설은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탄탄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보리사 지워진 여자」(이하 보리사-로 약칭한다)는 기형의 오른손을 가진 건강한 '나'가 수형생활을 하는 절망에 빠진 남편을 일으켜 세우고, 시어머니에게 그들의 결합을 인정 받고, 발달 장애를 겪는 아이를 돌보며, 또 폐암 말기에 이른 친구에게까지 희망을 심어나가는 이야기이다.
우선, 교도소로 남편을 면회 가는 첫 장면 설정이나 간결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독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과 남편이 시어머니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 아들 명준이를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알아챌 수 있다.
실상 이들 앞에 가로놓인 장애는 모두 남편과 관련된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조와 현재 자신의 처지를 포기하는 태도, 무당인 어머니의 운명론적 예언에 대한 반항, 아들의 치료비와 교육비를 위해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 그에 따른 공금횡령과 교통사고 등이다.
그러나 작가는 '나'가 과거, 자신의 가족을 회상하는 부분이나 희망을 버린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판의 태도를 취하기보다 오히려 객관적이고 거리화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이 점은 작가의 이전 소설에서 인물들에게 심히 간섭하던 묘사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느껴진다.) 교도소로 면회 오는 '나'는 자신의 환경 때문에 나약해지려는 속마음과는 달리 남편에게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말"라고 타이를 뿐이다.
교도소에서 옛 친구 '그녀'를 만나게 되지만, 그녀 역시 희망 없는 가운데 그녀의 남편을 면회 오는 환자의 모습이다. 그들은 지난 시절, 철저하게 각자의 현실을 사랑했고 어떠한 형태로든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지금 '그녀'는 더 이상 독재타도를 외쳐야 하는 명분이 없는, 확실하게 투쟁해야 할 '혁명'과 같은 것이 없어져버린 초췌한 모습으로 '나'에게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함께 그들의 모든 억눌린 짐과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공간인 남산을 오르게 되고, 거기 목 잘리고 비틀린 불상들의 모습을 보며 위로 받고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시어머니와 함께 남편을 면회하고서도 고부는 남산에 오른다. 시어머니의 변화된 심경을 토로하는 자리에서 '나'는 담요로 시어머니를 감싸고 시어머니는 온기 없는 손으로 '나'의 불구의 오른 손을 싸안는다. 운명론자이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운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나'의 손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는 장소. 오해가 이해로, 갈등이 화해로 풀리는 장소, 비틀린 불구의 몸들이 영험한 남산의 의미와 겹쳐지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절정은 보리사로 올라가는 위태로운 비탈에서부터라고 생각된다. 면회를 거절하는 남편이나 '나' 자신의 처지를 잊게 해주는 그 어떤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싶었을 때 남산의 여래불과 마애불 들이 목 잘린 모습으로, 또는 결가부좌를 풀지 않고 고통을 감내하며 처연하게 쓰러진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금 희망을 일으켜 세운다.
달빛 속에서 돌의 허물을 벗고 자유의 몸으로 석불들이 걸어나와 춤을 춘다. 목 없는 여래가 다리를 풀고, 양팔이 없는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비틀고 일어나는 석불의 모습은 드디어 남산을 그득히 채우고 원형의 보름달빛을 받으며 따스한 미소로 산 전체를 데운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찬 마루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하면서 "아직도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인가. 아직도 내가 있어 서러움의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혹여 장애를 지닌 손으로 그(남편)를 옥죄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대목을 읽으며 뭉클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나'의 자아가 사건을 주도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보다는 좀더 희생하려고 애쓰는 모습만 눈에 띈다. 선하고 고매한 주인공의 모습이 돋보이게 된 것같다.
'나'는 없어지고 그를 살리고 싶은 희망, 오그라진 손등 위로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나'는 새로이 아미타여래불을 발견하게 되고 소설은 점차 주제(의식)를 압축해 간다.
화려한 광배가 보료처럼 에워싼 여래좌상, 그러나 광배의 뒤쪽에는 거의 형체도 없는 약사여래 마애석불이 "우는 듯 삼키는 듯", 뭉개지듯 처참한 여자의 얼굴로 한몸을 이루고 있다. 고통과 환희가 함께 어우러지는 삶의 양면성, 옥죄는 현실을 등에 엎고 "미온의 물처럼 따스"히 흘러가야 할 앞날이 '나'의 눈앞에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처참하게 얼그러진 약사여래는 나의 얼굴인 듯, 그녀의 얼굴인 듯, 시어머니의 탈진한 얼굴인 듯, 희망 없는 곳에서 희망을 찾아 길 떠나야 하는 이 세상 모든 주인공들의 얼굴로 우리에게 부각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고통을 껴안으며 새롭게 일어서고 있는, 몸은 지워질지라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건강한 여인의 이야기가, 삶의 다양한 장애와 고통이 꽃피워 올린 남산의 목 잘린 불상들과 어우러져서 우리 삶의 소중한 진실을 일깨우는 소설이라 느껴진다.

**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는 참으로 우량하고 익살스러우며 강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 제목에서 '지워진 여자'라는 표현이 언뜻, 통속적인 것 같아 저로서는 머뭇거려집니다. 오히려 돌 속의 여자라든가, 아니, '무슨 무슨 여자' 대신 다른 말이 없을까요?
** 서술 문장에 대해 하고 싶은 말, 특히 표준어법과 사투리어법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글로써는 힘들어 얼굴 보기를 기다립니다.
** 존경과 갈채를 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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