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원 선생님의 시를 읽어보면, 60년대 후반에 쓴 시와 2000년대 초반에 쓴 것들이 어쩌면 그렇게 일관된 언어, 사상,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단히 놀랍습니다만, 한 편으로는 퍽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엄청나게 많이 변했습니다. 예컨대 60년대에 나온 [동아 새국어 사전]에는 [公海]는 있지만, [公害]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公害라는 낱말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상어가 되었습니까? 그때는 컴퓨터라는 것은 큰 연구소에나 설치되어 있던 덩치 큰 기계덩어리였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요즘 그리도 흔한 휴대폰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아니었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생님의 시편들은, 관심영역이나 시의 토운이나 어휘나 그 정서마저도 거의 변한 게 없어보이니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김선생님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분의 베이트리체(?)를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 그런 개인사적인 이야기는 함구하고 계시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몇차례 가졌던 김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토론은 아주 지엽적인 것들, 예컨대 맞춤법이나 중첩된 이미지들 혹은 주어와 술어가 호응되지 않는 비문의 예들, 중문이나 복문의 남용, 시제의 애매함, 2인칭의 혼란스러움.... 등등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시는 형식과 내용이 따로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지엽적이라고 말씀드렸던 부분들은 당연히 좀더 다듬어지고 선명해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시에서는 잘못된 표현(?)이란 용납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40년 가까이 거의 변함없이, 그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을 써오신 김선생님의 시적 열정과 샘솟는 시심은 정말로 놀라움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점을 존경하고 부러워합니다.
표현상의 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물빛 회원들의 모임과 홈페이지에서는 김학원 시의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 기쁨과 고뇌, 어두운 심연과 불안, 죽음 앞에 선 작자의 실존, 영원한 여성과 구원 ......, 그런 것들에 대한 꼼꼼한 탐색과 토론이 전개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