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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란씨의 <이름씨>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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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씨
유자란

원래 내 것이 아닌데
내 마음그릇에
타인이 담길 때가 있다
내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니건만
바람의 신이 데려와
마음밭에 내려놓은
이름씨 하나가 있다
가만가만
슬픔의 실뿌리를 내리고
토착식물을 밀어내며
내 느낌의 땅에
온통 제 이름의 꽃을 피우는
타인이 있다



오랜만에 유자란의 시를 읽었습니다. <하루> <이름씨> <목련>이 그것입니다. 첫 느낌은 이 시인이 작품의 제목을 붙이는 게 너무 재미없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목을 붙이는데 별로 고심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세 편 중에서 <이름씨>에 대한 독후감을 적어봅니다.

여기 <이름씨>라는 다소 생경한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본래 것들을 밀어내고 <온통 제 이름의 꽃을 피우는 타인>, 내 마음속의 타인입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리고, <제 이름의 꽃을 피>워서 <내 느낌의 땅>을 다 점령해 버리는 타인, 간절한 타인 말입니다.

우선, <이름씨>라는 제목을 보니, 최현배 선생의 문법용어가 떠오릅니다. 움직씨(동사), 어찌씨(부사), 이름씨(명사).....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름씨>는 <명사>라는 품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꽃씨> <풀씨>와 같이 <이름의 씨>로 보입니다.

이름이란 어떤 것(대상)을 가리키지만 그 <어떤 것 자체>는 아닙니다. <어떤 것>은 이름을 통해서 그 본질이 드러나지요. 구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사물의 이름을 짓도록 합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을 <그것이 되도록> 확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구절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물을 만들고, 인간(시인)은 그 사물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인간이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인간이 그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물을 만들고 인간(시인)은 의미를 만드는 것이지요. 시인(인간)이 제2의 창조자라고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이 작품)서 시인(혹은 작자)은 <타인>의 이름을 짓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느 날 문득 <바람>이 어떤 낯모르는 <이름>의 <씨>를 하나 가져다가 시인의 <마음 밭>에 내려놓고 가 버리지요. 그 작은 씨앗이 가만히 실뿌리를 내리더니 나중에는 <토착식물(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밀어내고, 시인의 <느낌의 땅>이라는 감성 위에서 <온통 제 이름의 꽃을 피우는> 나무(타인)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시인의 감성은 그 <이름의 꽃>이라는 <타인>의 것으로 점령당합니다.

<씨>는 <꽃>이 됩니다. 꽃은 씨의 자기실현의 형상입니다. 낯모르는 한 <타인>이 <나의 마음>속에 작디작은 한 개 씨앗으로 들어와서, 가만히 실뿌리를 내리더니 무성하게 자라 온통 그의 꽃으로 시인의 느낌의 땅(감성)을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그 <타인>은 시인의 <마음>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타인>이란, 시인의 밖에 있는 객관적인 타자가 아니라, 시인 안에 있는 <타인>, 달리 말하면 시인의 감성으로 명명된(이름 붙여진) 타인(여기서는 이름씨)으로서, 현상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은 시인의 의식, <노에시스>에 대한 <노에마>인 것입이다.

시인이란 하나의 <감성>입니다. 감성은 느끼는 일을 할 때 비로소 감성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 무엇엔가 부딪쳐서야 비로소 밝게 빛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태양의 빛이 뻗어나가는 공간은 검게 보이지만, 그 빛이 별에 부딪치면 찬란하게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어딘가에 부딪칠 때 비로소 빛을 실현합니다. 시인의 감성도 어떤 대상으로 해서 비로소 감성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 - 감성을 실현하도록 촉발시키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이 작품에서 <이름씨>이며, 이름씨로 해서 지금 유자란이라는 감성이 예민한 감성은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 사족 : 아무래도 제목 <이름씨>가 나에게는 어색하게 걸립니다. 중학교 때 배운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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