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란씨의 <이름씨>를 읽고, > 작품을 읽고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작품을 읽고

|
02-03-07 18:27

유자란씨의 <이름씨>를 읽고,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전 체 목 록

이름씨
유자란

원래 내 것이 아닌데
내 마음그릇에
타인이 담길 때가 있다
내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니건만
바람의 신이 데려와
마음밭에 내려놓은
이름씨 하나가 있다
가만가만
슬픔의 실뿌리를 내리고
토착식물을 밀어내며
내 느낌의 땅에
온통 제 이름의 꽃을 피우는
타인이 있다



오랜만에 유자란의 시를 읽었습니다. <하루> <이름씨> <목련>이 그것입니다. 첫 느낌은 이 시인이 작품의 제목을 붙이는 게 너무 재미없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목을 붙이는데 별로 고심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세 편 중에서 <이름씨>에 대한 독후감을 적어봅니다.

여기 <이름씨>라는 다소 생경한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본래 것들을 밀어내고 <온통 제 이름의 꽃을 피우는 타인>, 내 마음속의 타인입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리고, <제 이름의 꽃을 피>워서 <내 느낌의 땅>을 다 점령해 버리는 타인, 간절한 타인 말입니다.

우선, <이름씨>라는 제목을 보니, 최현배 선생의 문법용어가 떠오릅니다. 움직씨(동사), 어찌씨(부사), 이름씨(명사).....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름씨>는 <명사>라는 품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꽃씨> <풀씨>와 같이 <이름의 씨>로 보입니다.

이름이란 어떤 것(대상)을 가리키지만 그 <어떤 것 자체>는 아닙니다. <어떤 것>은 이름을 통해서 그 본질이 드러나지요. 구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사물의 이름을 짓도록 합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을 <그것이 되도록> 확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구절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물을 만들고, 인간(시인)은 그 사물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인간이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인간이 그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물을 만들고 인간(시인)은 의미를 만드는 것이지요. 시인(인간)이 제2의 창조자라고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이 작품)서 시인(혹은 작자)은 <타인>의 이름을 짓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느 날 문득 <바람>이 어떤 낯모르는 <이름>의 <씨>를 하나 가져다가 시인의 <마음 밭>에 내려놓고 가 버리지요. 그 작은 씨앗이 가만히 실뿌리를 내리더니 나중에는 <토착식물(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밀어내고, 시인의 <느낌의 땅>이라는 감성 위에서 <온통 제 이름의 꽃을 피우는> 나무(타인)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시인의 감성은 그 <이름의 꽃>이라는 <타인>의 것으로 점령당합니다.

<씨>는 <꽃>이 됩니다. 꽃은 씨의 자기실현의 형상입니다. 낯모르는 한 <타인>이 <나의 마음>속에 작디작은 한 개 씨앗으로 들어와서, 가만히 실뿌리를 내리더니 무성하게 자라 온통 그의 꽃으로 시인의 느낌의 땅(감성)을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그 <타인>은 시인의 <마음>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타인>이란, 시인의 밖에 있는 객관적인 타자가 아니라, 시인 안에 있는 <타인>, 달리 말하면 시인의 감성으로 명명된(이름 붙여진) 타인(여기서는 이름씨)으로서, 현상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은 시인의 의식, <노에시스>에 대한 <노에마>인 것입이다.

시인이란 하나의 <감성>입니다. 감성은 느끼는 일을 할 때 비로소 감성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 무엇엔가 부딪쳐서야 비로소 밝게 빛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태양의 빛이 뻗어나가는 공간은 검게 보이지만, 그 빛이 별에 부딪치면 찬란하게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어딘가에 부딪칠 때 비로소 빛을 실현합니다. 시인의 감성도 어떤 대상으로 해서 비로소 감성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 - 감성을 실현하도록 촉발시키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이 작품에서 <이름씨>이며, 이름씨로 해서 지금 유자란이라는 감성이 예민한 감성은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 사족 : 아무래도 제목 <이름씨>가 나에게는 어색하게 걸립니다. 중학교 때 배운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 때문일까요?
TAG •
  • ,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목록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58 김세현씨의 [상사화]를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7-01-17 1363
57 김학원 선생님의 <집사람>을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7-01-04 1239
56 정해영씨의 [그곳이 아프다]를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6-05-16 1077
55 정해영씨의 <연인>을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5-02-28 1059
54 강은소 시인의 <적멸궁에 앉아>를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5-02-01 1528
53 김학원 선생님의 작품 <석양> 고쳐읽기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10-15 1031
52 김학원 선생님의 <낙조>에 대하여,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10-14 1270
51 신상조씨의 [안녕, 잘 가]를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09-17 1291
50 정해영씨의 작품 <아이스 홍시>에 대하여,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07-01 1189
49 신상조씨의 작품 <침묵>에 대하여,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06-18 1223
48 신상조씨의 작품 <편지>에 대하여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03-25 1006
47 신상조씨의 [눈바람]을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02-18 1127
46 신명숙씨의 <산은 지금 올이 고르다>를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02-09 1775
45 신상조씨의 <곰국을 고며>를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4-01-29 1346
44 김상연 시인의 <들여다본다>에 대하여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3-12-03 1485
43 이도원의 소설 [내 생의 자명종]을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3-09-09 1267
42 정정지님의 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에 대하여,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3-05-29 939
41 이상(2商)님의 작품 [산과 노을]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3-05-22 908
40 은장도님의 [窓]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3-05-20 863
39 김학원 선생님의 [아침]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3-05-15 815
38 김세현의 [중독자]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3-02-08 852
37 이도원씨의 소설[자개장롱이 있는 집]을 읽고, 인기글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2-10-02 1057
36 김학원 선생님의 [숲에 들어간 이유]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2-04-08 646
35 [김학원 시]의 불가사의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2-04-01 569
34 답변글 선생님의 소설 <결혼>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2-03-18 591
» 유자란씨의 <이름씨>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2-03-07 823
32 정정지님의 <겨울 일기>에 대하여,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2-01-23 744
31 김세현 시인의 <립스틱이 지나간 자리>에 대하여,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10-27 692
30 박경화씨의 <반딧불이>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8-22 774
29 금이정씨의 <가시연>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8-20 699
28 답변글 금이정씨의 <가시연>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8-21 659
27 김세현씨의 <폭우>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7-30 659
26 금이정씨의 <매미>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7-18 599
25 김세현 시인의 <격포-달밤>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7-07 688
24 금이정씨의 <우리는 사자입니다!>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7-06 716
23 답변글 시가 무엇으로 쓰여지다니요?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7-04 686
22 박경화 시인의 <그대 떠나고>에 대하여,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7-01 911
21 권영호시인의 <홍수지다>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7-01 623
20 권영호님의 봄밤에 대하여,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6-04 575
19 답변글 제 비평에 대한 쓴 비평 달게 받겠습니다.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6-04 544
18 정정지님의 <동행>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6-01 554
17 이도원씨의 답변을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6-01 804
16 이도원씨의 <저녁놀> 비평에 대한 대답과 질문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5-28 700
15 김세현씨의 <가로수>에 대하여,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4-17 627
14 서경애씨의 <낚시>를 읽고,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4-16 545
13 신진영씨의 절창 <환절기>에 대하여 이진흥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001-04-12 508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