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일기
정정지
당신이 자리에 눕던 날
하늘은 잿빛으로 내려앉고
퇴색한 낙엽 위론
허기진 바람만 달려가고 있다
곧 바닥 날 링거병 속
주사액 같은 당신의 생명
온기를 잃어가는 손
지상의 모든 길 끊으려는듯
황급히 퍼부어대는 저 눈보라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느냐고 물었다지요? 그만큼 절실한 것을 써야 된다는 뜻이겠지요. 찰스 디킨스도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가난과 고통을 얘기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쓴 것이 올리버트위스트 같은 명작이 됐다지 않습니까? 정정지님의 이 작품을 읽으니 정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몸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절실함을 쓴 것이어서, 이 시를 읽는 저의 앉음새를 바로 하게 만듭니다.
<자리에 눕던 날>..... 화자에게 가장 소중한 <당신>이 자리에 눕던 날이니 하늘인들 맑겠습니까? 하늘도 <잿빛으로 내려 앉>아 화자의 근심과 걱정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중 구절로 보아 아마 계절도 겨울이어서, 나뭇잎도 따 떨어져 낙엽으로 뒹구는데, 그마저도 퇴색해 있습니다.
나뭇잎의 떨어짐, 그것의 퇴색은 모두가 죽음을 가리키는 표지들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낙엽 위로는 허기진 바람이 지나갔습니다. <당신>이 병상에 눕던 날, 화자의 어둡고 걱정스러운 심정을 화자는 직접 드러내지 않고 <잿빛 하늘> <퇴색한 낙엽> 그리고 <허기진 바람>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방법이 시적 형상화이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제1행에서 당신이 자리에 <눕던>날이라고 과거시제를 썼으니까 제4행에서도 <달려가고 있다>는 현재형보다는 <달려갔다>는 과거형 시제를 쓰는 게 맞겠군요. 그런데 제가 이 시를 썼다면 <달려갔다>보다는 그냥 더 자연스럽게 <지나갔다>로 하고 싶습니다. <달려갔다>는 표현이 생동감은 있지만 어딘지 좀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취향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제2련의 묘사는 참으로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당신>의 생명이 지금 링거병 속의 주사액처럼 시시각각으로 줄어들고 있는데 화자는 그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안타깝고 절망적입니다.
<당신>의 꺼져가는 생명을 <곧 바닥날 링거병 속의 주사액>처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는 지금 생명이 소진되어 가는 환자가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링거병이라는 차갑고 투명한 유리의 광물성 이미지, 또한 주사액의 맑고 투명함이 주는 비생명적 느낌, 그것이 고무 호스를 타고 <당신>의 앙상하게 드러난 팔의 정맥으로 들어가서 겨우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어 주고 있는, 안타깝고 가슴 아픈 정경이 그대로 다가옵니다.
더구나 지금 손은, 따뜻했던 사랑의 손길로 나를 잡아주었던 당신의 손은 힘없이 차츰차츰 <온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미세한 온기가 사라지면 이제는 영원한 이별만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 절망적인 상황을 상상하면 독자들도 가슴이 막힐 것입니다.
지금은 생명이 다해 가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에게 정말 안타깝고 무력한 시간이지요.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심경을 지금 창 밖의 풍경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 눈보라는 지상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서정적인 <눈>이 아닙니다. 그것은 1련에 나왔던 <바람>과 합세하여, 마치 <지상의 모든 길 끊으려는 듯> 그렇게 <황급히 퍼부어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상의 모든 길>은 물론 사람과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물리적인 길(도로)이기도 하지만, 생명이 다해 가는 <당신>과 당신을 바라보는 무력한 화자(나) 사이의 길(통로)이기도 합니다. 눈보라는 바로 그 통로를 끊어 버릴 듯 거칠고 황급하게 퍼부어대고 있습니다. 이 때의 어쩔 수 없는 무력감, 거부할 수 없는 이 실존적인 상황이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줍니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병실 창 안쪽의 불안한 눈빛들과 적요한 그늘, 그리고 창 밖의 퍼부어대는 눈보라의 역동적인 이미지가 콘트라스트되어 그야말로 탁월한 시적 성취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