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칼 같은 기쁨>에 수록된 <잉게에게>를 다시 읽었습니다.
잉게라는 의미를 모르니 선생님의 시는 의사가 내는 처방전과ㅡ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시제를 무시한 채 선생님의 시를 볼 수 밖에 없군요.
고뇌라는 말과 고통이라는 말이 1행과 2행에서 순차적으로 나옵니다.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이 두 낱말의 차이는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로 인해 힘을 충분히 얻기는 합니다. 피를 뿜고있는 대지가 처절하게 소멸해간다는 것이 고통이며 고뇌이며 슬픔이다가 나중에 올리브색 부리까지로 이어지는 사랑의 순애보라는 다소 식상한 주제를 선생님이 갖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덕목인 사유로 인해 평범하게 읽히지 않도록 합니다. 고뇌,고통,슬픔,처절,소멸이라는 추상적이고 낡은 시어를 마음껏 충돌 시키면서도 의연하게 버틸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바로 하늘의 슬픔을 물어다가 꽃씨로 뿌리는 새의 부리때문입니다. 이 사유가 독자들을 꼼짝달짝 못하게 만듭니다.
시인은 <아니?> ,<이해하니?>,<본 일이 있니?> 라는 말로 자신의 사유를 묻고 있지만 사실은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의 정당성을 집요하게,오만하게 확인 받으려고 하는 거지요(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특히 마지막 두 행<빛나는 것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처절하게 소멸해 간다는 것을 아니?>은 소멸해야지만 존재의 당위를 얻는다는 , 확신에 찬 시인의 개입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것인데 빛나는 존재가 선택한(선택당한 건지도 모르는) 소멸에의 의지가 불건강해 보입니다. 기꺼이 선택한 소멸에의 의지는 희생이라는 숭고한 이상 뒤에 자기파멸이나 자학의 또다른 포장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듭니다.
시제에 대한 불친절한 시인의 태도 때문에 다소 감정적인 비평으로 흘렀을 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