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풀어내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다.
<처억하니 눕혀> <마음놓고 어울려 살어라 한다>
<몇백년 누워계신 부처님> 있다등 물처럼 풀어내고 있다.
부처와 와송(臥松)을 동격화 시키는 시인의
단단한 마음도 한 몫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류의 시가 못마땅하다.
우선 가르쳐 들려고 하는 설법 같은 시가 그렇고
그 설법을 지우면 어떤 새로움이 없어서 그렇다.
부처가 어디 와송 뿐이랴.
사바세계가 근심이 되어 기꺼이 몸을 누이고
귀를 기울여 듣는 와송은 이미 부처라고 시인은
독단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와송은
사바세계에 부처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사바세계의 탐욕과 수치 그 속의 건강함,생명력이
탐나 쭉쭉 뻗지 못하고 엿듣는 것이다.
이 시는
도를 닦는 중 보다
부엌에서 땀 흘리는 공양보살이
오히려 부처다라고 말하는 일반에서
한 치도 나아가고 있지 않다.
요즘 사람들, 특히 시인들이 이름없는 꽃이나
식물에다 관심을 가지는 유행이 번지고 있다.
동물이 뿜어내는 번질거리는 욕망이나 호전성이
싫어서? 시인이라면 적어도 꽃이름, 나무 이름 정도는
꿰차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
나는 그들이 꽃을 사랑하듯이 이 사바세계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하고 싶다.
사바세계에 비판적 지지자가 되기 위해
식물에게 말을 건다면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