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이 정도로 쓴소리의 수위를 높였다니...많이 봐준 것은 아닌지...혼자 웃으며 그대의 딴죽걸기에 나의 딴죽을 보태오.
그대도 알다시피 이제껏 써온 작품과 다른 이번의 두 작품은 나도 모르게 나온 한숨과 같은 것. 아니라 고개 저어도 가슴속 고인 것은 어쩔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법....
누가 뭐라고 해도 생명에 대한 역할과 책임은 여성만의 특권이라 여김(남성의 보조 없이는 불가능함도 인정). 그 책임과 역할을 선택하고 안하고도 대다수 기혼 여성의 특권,특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이제 나의 상처를 스스로 선택한 특권으로 여기게 되었다오.)
내 시에 대한 그대의 쓴소리는 나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에 대한 그대의 딴죽으로도 받아드리며 그 고마움 잊지 않겠소.
그대의 쓴소리,나에게는 둘도 없이 귀한 보약임을 고백하며 이후로도 더 많은 보약재를 바라오. 안녕,늘 그리운 내 청춘의 한 때 같은 글벗이여-
> 이도원 님이 쓰신 글입니다.
> 아름다운 서정시이다. 시인 자신이 고백했듯 자신의 체험에 솔직한 시이다. 자신의 상처를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시인이 이제껏 써온 다른 작품과는 차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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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은 불임의 여성이 참나리의 생태를 빌어 자신의 욕망을 희구하였고 <저,아가에게>는 첫사랑 꽃불같은 아이가 태어난 뒤의 모성애를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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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시의 속성대로 서술적으로 , 행간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은 <고백>의 경우, 제목에서 보듯 지극히 개인적이며 소박하다. 시 전반에 걸쳐진 나의 연발은 ('나,어느 산 숨어들어' '나 죽도록 꿈 꾸는 사이' '나 ,더욱 천천히 일어나며') 바로 시인이 주제의식을 한정 시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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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를 삶과 밀착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나 시인 자신의 개인적 체험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시의 마지막, <첫사랑 꽃불같은 아이하나 거두고 싶다고 참나리, 네게는 결코 말하지 않으리라>에서 강렬한 역설로 내적고백을 드러낸 점이 바로 그 대표적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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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아가에게> 의 경우 일정한 리듬을 타면서 유려하게 속깊은 모성을 표현하였다. 여기서의 어미는 꽃불같은 아이가 성장하여 어느새 자신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향하는 것을 안타깝게 보면서 회귀하여 돌아오길 바라는 심정을 나타내었다.
> 일반화된 모성을 재미난 언어로 표현했을뿐 신선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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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시인의 개인적 체험 위에 독자적으로 설 수 있는 사회적 울림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아이가 돌아오길 바라며 기다리는 이런 강박적인 모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일련의 사회 움직임이 이 시인에겐 들리지 않는가 하는 점 이었다.
> 생명에 대한 역할과 책임을 오로지 여자에게만 국한시킨 점이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기존의 낡은 이데올로기로는 상상력과 시를 다루는 기술이 높다할 지라도 결국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시인은 가장 나중까지 울고있는 사람>이라는 그 옛날의 무력한 시인관을 이 시인은 너무나 오랫동안 부여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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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스스로 쓴소리를 더 좋아한다고 하여 수위를 높였다. 나의 비평에 반론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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