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정씨의 <매미>를 읽고,
여름날 무더위 속에서 느티나무 줄기에 붙어 혼신의 힘으로 울고 있는 작은 매미의 울음소리는 거대한 느티나무 전체를 흔들어 울리고 숲과 들판과 나아가서는 세계를 울립니다. 시인에게 매미의 울음소리는 소리 이상의 소리인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매미와 느티나무라는 두 존재자 간의 관계를 읽게 됩니다. 매미의 적극적, 주체적인 자기실현의 태도와 느티나무의 조용하면서 수동적인 감싸안음의 자세는 각각 세계를 떠 받치는 두개의 힘이랄 수 있지요. 전자가 울음과 피와 죽음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면 후자는 침묵과 인내와 한숨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시에서 매미와 느티나무는 예술가와 민중의 관계로도 읽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으로 은유되면서 매미는 인간의 자기실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매미의 <한의 덩어리(소리를 얻지 못한 긴 세월)>는 어쩌면 인간의 조건 혹은 숙명인지 모르지요. 그러한 조건/숙명을 넘어서려는 초월의 의지가 자기를 넘어서려는 존재인 脫存, 즉 달리 말해서 實存인 것이며 그것이 우리들의 일상성을 깨뜨리게 하고 근본적인 것, 즉 <존재의 소리>에 마주서게 합니다. 이런 각성의 순간을 우리는 실존의 계기라고 하는데, 우리들에게 이 시는 그러한 뜻에서 우리 자신을 깨워서 일으켜 세웁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 시를 읽어보면 사실은 시인의 의식은 매미와 느티나무라는 양자의 관계보다는 매미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시는 매미로 은유되는 한 각성된 자(인간 :예술가 혹은 자기실현의 의지)가 자신의 <한을 깎아서>, 그리고 <제 목숨의 붉은 血(피)을> 짜 넣고, 자신의 모든 것을 <뼛속까지 다 비워내고 가>는 고통의 소리로 우리들의 가슴을 울립니다. 마치 수년 전에 상영되어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연상케 하지요. 우리들은 시인이 그러한 점을 너무나 잘 보여주므로 별로 생각하지 않고 얌전하게 시인의 설명을 따라가며 동의하고 감동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떨까요? 우리들이 그러한 시인의 해석에만 착하게 따라가면 우리들은 상식적인 범주 안에 머무는 것에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우리들은 이 시를 더욱 시답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매미 - 울음 - 자기실현>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정직한(상식적인) 해석을 뒤집는 어떤 것을 요구할 수는 없을까요? 예컨대 좀 더 욕심을 부려서 이 시인에게 보다 놀라운 코페르니쿠스적 轉回(?)를 보여 달라고 말입니다. 매미가 한을 깎으며 자신의 목숨의 피를 짜 넣고 자신의 존재를 뼛속까지 비우면서 소리를 빚어낸다는 정직한(?) 발상에 우리는 감동합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 우리가 이런 정직하고 모범적인(?) 작품에 오히려 어딘가 아쉬움을 느끼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들 자신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보다 놀라운 발상을 끊임없이 시인에게 요구하고 기대해 오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시의 역사는 그러한 독자의 요구와 시인의 응답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