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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가 왔다 

 

 

 

연둣빛 나뭇잎 한 장

 

손바닥에 올려 본다

 

한 잎의 무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한 잎의 봄

 

사월의 바람에 실려

 

푸른 말로 쓴

 

엽서가 왔다

 

 

 

 

둥근 속

 

 

 

시들해진 양배추

반을 잘랐다

 

겹겹

물결치듯 복잡한 주름

숨긴 듯 고여 있는

번민이 보인다

 

시든 잎을 벗겨 내면

이목구비가 똑 같은

새 잎이 나온다

 

벗겨도 벗겨도

알맹이는 없다

 

햇빛과 흙과

뿌리의 기억만이

얼비칠 뿐

 

불현 듯 다가오는

놀라움마저도

천천히 주저앉아

한 겹 잎사귀로 덮는

 

싸고 또 싸고

감쌀 줄 밖에 모르는

둥근 속이

꽉 찼다

 

 

 

 

뭉클한 것

 

 

 

세 살 된 아이가

울고 있다

 

막대사탕을 주어도

토끼 인형을 안겨주어도

발버둥을 치고 있다

 

말 대신 울음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점점 크게 들려오는데

 

엄마는

말없이 등을 내밀어

아기를 업는다

 

앉을 때도 같이 앉고

화장실도 같이 가고

다림질도 같이 한다

 

원래 한 몸이었던 둘

 

작은 심장이

둥글고 뭉클한 원적(原籍)

닿았는지

 

뚝 울음을 그친다

 

틈 없는 밀착

소리를 죽인

더 큰 진동이 오래

아기를 흔들고 있다 

 

 

 

 

 

 

평평하고 납작한 오후

 

 

 

수성시장 모퉁이

오래된 쌀가게 할머니

 

손님이 오면

품이 넉넉한 웃음을 얹어

한 됫박 봉긋이 담아 올렸다

펑미레로 고봉을 날려버린다

 

한 되를 맞추고

깎여나간 여분은

흰 새처럼 날아갔다

 

어둠이 평등하듯

바람이 공평하듯

 

공산품에 쓰인 규격처럼

숫자로 채워지면

온전한 생인 줄 알았는데

 

삶에 누런 잎이 생긴다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쌓아 올린 고봉

평미레로 날아가고

 

평평하고 납작한 오후

딱 한 되다 

 

 

 

그 흔한 말로

 

 

 

아직 바람 끝 차지만

 

볕이 따뜻해 졌다는

그 흔한 말에

푸슬푸슬 흙이

부드러워진다

 

멀리 있어도

따스하게 전해오는

소식이 있어 가족이

관계를 이루듯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나는 봄

 

벌써 맺혀 있는

목련 봉오리

솜털을 두르고 있다

 

사소한 눈짓에

흔한 말 한마디에

이미 와 있는 봄

 

볕이 따뜻해 졌다 

 

 

 

 

강을 빌리다

 

 

 

몇 년을 앓고 난 뒤 장애를 얻은 그녀,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주인이 따로 있는 빌린 몸, 되돌려 줄 것을 생각하고 아끼고 헤아리며 사용 했어야 했다고, 불편한 하루를 뒤척이는 일은 바다보다 혹한 보다 다스리기 어렵다 했다

 

경사 진 밭을 일구며 흙속을 몇 바퀴나 돌아 나온 강물의 노래에 흥건히 가슴 적신 적 있었지만 받은 대로 온전히 돌려주지 못하는 몸, 찢겨지거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물건처럼 가엾다 했다

 

늘 새롭게 흐르는 생명의 강에 한 발을 담그고 그 분 앞에 설 것을 생각하는 밤, 밑바닥을 긁고 또 긁어 하얀 박꽃 몇 송이 피운다고 했다 

 

 

 

 

꽃 뒤에 숨는다

 

 

 

그가 돌아온다

기러기처럼

 

그 동안 불러보지 못해

딱딱해진 호칭이

벌써 글썽이는데

책장이며 움푹한 세면대에

그리움이 고여 있다

 

급한 마음으로

아파트 담장 붉게 핀

장미 가지를 꺽어다

병에 꽂는다

 

불꽃같은 뜨거움이

번져간다

낯빛이 다르고 흙빛이 다른

타국에서

서늘히 식은 몸

덮어 줄

붉은 향기를 펼쳐 놓는다

 

무거운 등짐을 진 우리

서로

얼굴 바라보지 못해

꽃 뒤에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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