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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집 원고(남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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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바닷가 느린 우체통 앞에 서 있습니다

일 년 후 배달된다는 안내문
그 약속 변치 말라고
몸으로 해풍을 막아섭니다

주소지 없는 편지를 천천히 접습니다

파도가 부려놓은 물거품들
모래톱 쓸며 흩어지는데

저녁 무렵
눈 먼 별 하나 떠오릅니다

*****

산정일기


너를 돌려보내고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빽빽한 산비탈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다
참이라고 하면 정말 참인 줄 알았다

바람은 꼭대기 까치집까지 죄 흔들어놓고
뒤엉겨 산 아랫마을로 내리달린다
낮달이 움찔, 위로 솟는다

저물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나무들 엎어질 듯 나를 붙든다
오갈 데 없는 낙엽들 밟혀
너덜너덜해진 길
새들은 허공을 치며 날아가고
바람은 다시 고일 것이다

조금씩 잠에서 깨어난 별빛들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는 우주인 같이
떨리는 발 내디디고 있다

*****

루키가 잭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사람들 미소 뒤에 날름거리는 붉은 혀가 보였다 머리 밑에는 피딱지가 거울 속에는 눈 꼬리 무른 아낙이 보였다 야성을 잃고 먹이만 받아먹다가 비대해진 도도새처럼 뒤뚱거리며 목욕탕을 찾았다 고통의 족쇄 풀린 몸이 스르르 욕탕에 잠기는 순간 누가 어깨를 툭 쳤다 문디 가시나, 익살스런 얼굴이 눈을 흘기자 얼빠진 듯 감전된 듯 몇 십 년 세월 뒤편에서 폭죽이 터졌다 그때 아무것도 모른 채 무지개를 타고 오르던 루키가 잭에게 손을 내밀었다 살아온 육십 년이 뒤집어져도 추락해도 어제는 우리 푸르디푸른 날개, 문디 가시나였다


*******

두 봄


안 올 것 같더니
살금살금 기어든다
담벼락 너머에서 마구 터지는
저 산발한 빛의 폭죽들
머잖아 온 땅 들쑤실 것이다
지난겨울
어쩔 수 없이 긁었던 카드빚도
환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늘 베고 앉아 셀카를 찍는다
어두운 것들의 존재증명 같은
햇살의 아우라 속으로
팔을 뻗은 여인이 오르고 있다

바람도 없는데
하늘 물빛이 출렁거린다

******

행인行人

산골 사과밭 지나다가
몰래 들어가 사과를 만져보는데
툭, 탱탱볼 하나가 떨어진다
느낌표 같다

햇빛과 달빛을 업고
봉긋이 피워 올린
목숨 건 일생이 손을 놓았다
덜컥, 가슴이 뛴다

도망치다가 돌아보니
거기 그 사과나무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하다

한때 벼랑 끝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

망각시대·1
― 일상


뿌리는 힘이 세다 천 날을 하루 같이 뻗어나간다 비비적대면서 스멀스멀 파고들면 바위도 쪼갤 수 있다 뿌리는 기둥서방 같다 돌이키는 법이 없다 견디다 못해 비수를 품고 다가가 쿠욱 찔러보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뿌리칠 수 없는 그 뿌리가 나와 한 몸인 걸 알았을 때 뿌리는 단단한 뿔이 되어 자꾸 치받는다 목숨이 세 들어 사는 그늘, 뿌리가 시키는 대로 팔을 벌린다 오늘이 순조로워진다

********

망각시대·4
― 늦가을 계곡


가을은 단풍 잎맥조차 쫘악 훑어가며 반짝이더니 볕이 산허리를 넘자 금세 토라진다 뼈마디 붉은 울음을 어둠으로 묶어 귀곡산장 담벼락에 주저앉힌다 떨어지는 고요가 빈 단두대 같다 바람도 숨을 참고 있는데 발밑에 깔리는 따뜻한 입맞춤들 아무도 없어서 지구 밖이 환하다

*********

망각시대·5
― 살림


장롱 속 쑤셔 넣은 옷들이
게가 거품을 뿜어내듯
꾸역꾸역 삐져나온다
늙수그레하다고 눈까지 흘긴다

찬장 바닥도 꺼질 듯 내려앉는다
네 흉허물 다 보았노라고
참을 만큼 참았노라고

흔들의자에 실려
졸며 끄덕이는 마음
더께 앉은 유리창 밖이 희끗희끗하다

******

망각시대·7
― 옮겨가다


삼시 세끼 남은 음식
작은 찬통에 비우고
널브러진 살림들 좁혀 세운다

웃자란 다육식물 꺾어
작은 화분에 옮기고
먼지 앉은 책들
눈 질끈 감고 들어낸다

안 보면 잊히는 일
몸 가는 곳에 마음도 따라간다
해 질 무렵 근심도
너를 보낸 기억도

보이지 않는 자리
마음 옮겨간 자리

낙엽들 누워서
흙에 잠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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