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37집 원고 ( 전영숙) >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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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9 15:39

물빛 37집 원고 ( 전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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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아픔을 부려 놓고


전 영 숙


아픈 손을 쥐고
강가 돌에게 간다
부은 자리를 가만히 대면

한 번도 돌아앉지 않고
내 아픔을 고스란히 받는 돌

이토록 둥글고 단단한
면을 내 주고 돌의 속은
또 얼마나 무거울까

눈이 아파도 귀가 아파도
달려갔던 어린 날처럼
아픔을 부려 놓으면
오히려 따뜻해지는 돌

늘어났다 줄어드는 그림자
일렁이는 무늬들
생물로 가득해
욱신거리던
통증이 가벼워진다
견딜만하다



수국을 잃고


전 영 숙


수국 꽃 피어
화단 한 쪽이 봄 내
넘실거렸다


크고 둥근 한 송이 꽃 속에
수십 송이 작은 꽃들이
물결치고 파도쳤다

봄의 쪽배를 오래토록
밀어주던 꽃
풍덩 빠져 살아도 좋았던
어느 날

수국이 뿌리 채 뽑혀 없어졌다
저보다 더 큰
빈자리를 만들어
없는 저를 자꾸 들여다보게 했다

잃어버린 물의 나라가
한없이 넓어
하늘이 다 들어와도
헐빈했다

달빛도 길고양이도 모르는
은밀한 꽃의 세계가
은밀하게 사라진 후
알았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깊이 페인 상처 모두
상실의 꽃자리였음을



사월의 보폭


전 영 숙


성큼
산이 다가 와 있다
거인의 한 발
저 큰 보폭의 사월

큰 덩치를 흔들며
어깨를 들썩이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날아오를 듯

와장창 창이 깨진다
벽이 무너진다
내 방에 범람하는 초록

오래토록 헐벗은 침묵이
말라비틀어진 말이
한없이 부드럽고 연해진다
실바람에도 부풀고 춤춘다

뒤집힐 때 더욱 반짝이는 말
솟구칠 때 더욱 넓어지는 춤
물오른 거인의 몸

흘러넘치는 말을
두 눈과 귀를 벌려
빼곡히 받아 적는다



구두를 들고 맨발로



전 영 숙


돌담아래 봉숭아
한 주먹 따 내면
내일 그 보다 더 피어
따 낸 자리 보이지 않는다


얼른 일어나 눈물 닦고
깨진 무릎에
빨간 약 발라 놓던
봉순 이처럼
재빨리 상처를 꽃으로
감싸 놓는 봉숭아

하양 보라 다홍
그늘진 담 밑이 화사하다
작고 여리고 소박해도
뙤약볕처럼 뜨거운 봉숭아
구두를 들고 맨발로
뛰어가던 봉순이 같은 꽃

다홍물 흠뻑 들어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봉숭아로 피어 한들거린다
영 글러버린 이번 생의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 있다



긴 끈


전 영 숙


제라늄 화분 속에
지렁이 한 마리
뿌리처럼 박혀

나올까 나올까
수없이 들여다보는
불안한 동거

꽃을 묶는 끈
같은 지렁이
죽 늘이면 끝없이
길어지는 길

나갈까 나갈까
캄캄한 어둠을
접었다 폈다
기어 간 길 모두
밀어 올려

허공에 불쑥
붉은 꽃 한 다발
묶어 놓았다



봄볕에 탄 말


전 영 숙

끊는다는 말은
봄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사리 독 같은 말

주먹 꼭 쥐고 올라온 고사리
끊는 재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재미

끊는 것에
재미라는 말은
봄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사리 주먹 같은 말

아무런 요령 없어
누구라도 한 바구니
꺾어 담을 수 있다는 말은
봄철에 잠깐
고사리 밭 같은 말

말린 고사리 같은 그녀가
내 뱉는 봄볕에
탄 말은 삶을 이긴
손놀림 같은 말



꽃모가지를 부러뜨렸다


전 영 숙


봄볕 속에 쭈그리고 앉아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치 듯
떨어진 꽃모가지를 붙였다
흠잡을 데 없이 만들어
내 놓은 햇볕의
작품에 금이 갔다
금간 힘으로 마저 피어라
투명 테이프를 꼼꼼히 감았다
줄기에 푸른 물이 오르고
꽃이 점점 벌어졌다
망가졌다고 함부로 버린 것
보란 듯이 활짝 피었다
다 망가진 나를 버리지 않고
아직도 박음질 중인 햇볕
햇볕 한 줄기가 하는 일을
알아채는데 한 봄이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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