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36집/남금희 5편(수정 후) > 토론해봅시다

본문 바로가기
|
19-10-18 10:52

물빛 36집/남금희 5편(수정 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목    록  
<협착, 스토커> 등에 수정한 부분이 있어 다시 올립니다.
이 파일로 갈아주십시오.*_*

구름의 박물관 외 4편

남금희



사직서를 내자
달아나던 시간들이 열없이 멈춰 선다
짐을 꾸리며
가장 크고 무거운 짐 덩어리는
유에스비 안에 옮겨 담는다

십 수 년의 기록이 사뿐히
방을 바꾼다
종이 한 장 없이

클릭 하지 않으면 되살아나지 않을
유물들이 깔린
여기는 구름의 박물관
날마다 문 두드리며 씨름하던 몸이
식은 커피처럼 적막해지는 사이

구름 한 점 속에 또 다른 구름이
열리고 닫힌다



가을장마



집을 자주 비우는 아내에게 삐쳐서
집을 나왔다
골목길 내려와 가게 앞 처마에 멈춰 서자
비는 소강상태
가방을 멘 학생들이 두런두런 지나가고
마주 오는 아주머니 우산이
묵직한 시장 가방 쪽으로 기울어 있다
물웅덩이가 파인 아스팔트 위를
한 사내가 바짓가랑이를 거머쥐고
허둥지둥 횡단한다
차가 경적을 울리자 물보라도 따라붙는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로수 늘어선 길 끝을 바라본다
멀리서 보면 모든 게 풍경이다

어디를 돌아도 길은 이어지고
바람에 후드득, 풀 죽은 비꽃들 떨어진다





협착, 스토커



그의 주파수는 잘 잡히지 않는다
밤새도록 컴퓨터와 씨름할 때
밥 때도 잊고 거리를 쏘다닐 때
슬쩍, 그가 인기척을 보인다

그는 가끔 경고음도 울린다
못 들은 척 황급히 달아나면
번개 치듯 허리를 낚아챈다
땅이 기우뚱한다

등줄기가 타들어가는 암흑의 긴 터널
마취된 시간은 안부를 묻지 않는다

며칠 후 아침이면 그는 사라지고 없다
점점이 구름 거느린 하늘은 야속하고

나이 들수록
여우처럼 헤헤거리며 그의 눈치를 본다
흐느적대며 눈물 냄새를 맡는다




곡비 생각



나 그럴 수 있다면 다음 세상에는
곡비로 태어나리
예서 못다 운 속울음
거기서 실컷 울어 제끼리
회한의 봇물 터뜨려
절로 취한 노래는 구성지게 흘러가리
무릎 꿇고 울다가 서서도 울리
뒤돌아보면서도 잠자면서도
쌓인 눈물이 죽은 자의 영혼을 깨우는
사자후가 된다면
아, 그렇게 되면 아무도 나를 청하지 않으리

그러니 나, 아니 태어나는 게 좋으리
밤하늘 별똥별처럼 스러져
어둠 속에 잠기고 말리
죽음보다 깊은 잠의 세상
눈물에 부푼 손들 잡아나 보리
먼 데서 나팔소리 울린다면
못 이기는 척, 눈 한 번 떠 보리




* 곡비(哭婢):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상을 당했을 때 상주 대신 곡을 하는 노비.




허공의 집




이사 올 윗집이 공사를 시작했다 아침 허공을 찢는 망치질 굉음 이튿날 따발총 소리 쉬는가 싶더니 오늘은 탱크가 바퀴를 굴린다 으깨고 비튼다 벼락 치는 산꼭대기에 혼자 선 듯 고꾸라지다가 마침내 올라갔다 벽이 해체된 뿌연 먼지의 집에서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팔딱거렸다

문을 밀치고 들어간 창 넓은 커피숍 구석진 의자에 몸을 던진다. 타박상 같은 둔한 통증이 저만치 머그컵에 가닿는다 왕관을 이고 물결머리 늘어뜨린 초록여인이 슬몃 입꼬리를 올린다 빈 종이컵처럼 나동그라질까 묵직하게 곧추앉으며 위아래 없이 모여 사는 풀꽃들 이름을 중얼거려본다 벌판까지는 여러 갈래 길이 있고 바다가 보이려면 더 멀리 가야 한다

우중충한 구름장 위에서 하늘은 오후 내내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퍽퍽 얻어터지는 구름 비늘들 문을 나서자 떨어져 내린다 제법 얼굴을 간질인다 바람이 어둠을 몰고 달려오자 북적대던 세상이 얌전해진다 한밤쯤 되면 길들의 경계는 흐려질 것이다 누울 자리가 참 많아지겠다

TAG •
  • ,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목록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554
35집 원고-정정지
목련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4
288
553
35집용-남금희-수정 7편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2
227
552
35집 원고
돌샘 이재영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9
342
551
35집 원고 -김세현
로즈윈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0
395
550
교수님의 시집 <어디에도 없다>에 관한 서평 원고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5
323
549
35집 원고 - 고미현
침묵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30
611
548
이렇게 고쳐 봤습니다
여호수하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1-16
180
547
36집 원고 / 전영숙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2
211
546
물빛 36집 원고
돌샘 이재영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7
203
545
물빛 36집 원고 / 정정지
목련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9
186
544
36집 원고 / 정해영
하이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09
548
543
물빛 36집 원고
이오타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5
179
542
물빛 36집
이오타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5
213
541
김세현 시집 서평-남금희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6
196
»
물빛 36집/남금희 5편(수정 후)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8
221
539
2019년 물빛동인지 원고
여호수하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8
297
538
물빛 36집 원고 / 이규석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9
295
537
36집 원고 / 곽미숙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19
364
536
36집 원고
고미현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1
226
535
나의 도장 (물빛 37호 예비 원고)
돌샘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8-02
305
534 답변글
나의 도장 (물빛 37호 예비 원고)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8-12
219
533
37집 원고, 앞쪽형 인간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8
237
532
물빛 37집 2, 고향집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8
253
531
물빛37집 3, 금붕어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8
219
530
물빛37집 4, 엉겅퀴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8
222
529
물빛37집 5, 토정비결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8
304
528
물빛37집 6, 해후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8
275
527
물빛37집 7, 고얀 놈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8
261
526
물빛37집 8, 코로나 19
cornerlee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8
236
525
37집 원고 / 정정지
목련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9
286
524
37집 원고(정해영)
하이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9
361
523
물빛 37집 원고 ( 전영숙)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29
234
522
물빛 37집 원고 (곽미숙)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30
238
521
물빛 37집 원고 (이재영)
서강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30
279
520
물빛 37집 원고 (고미현)
침묵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31
227
519
37집 원고(남금희)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31
279
518
37집 책머리에(머리글)
조르바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31
261
517
37집 원고 여호수하
여호수하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0-31
255
516
889회 시 토론 ㅡ 아이에게는/이오타님
1
조르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26
324
515
889회 시 토론ㅡ 빅 브라더/조르바님
1
조르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26
364
514
889회 시 토론ㅡ찡긋 웃는다/하이디님
1
조르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26
366
513
889회 시 토론 ㅡ 수저통/서강님
2
조르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27
440
512
889회 시 토론 ㅡ 몬스테라 옆에 제라늄이 있다/해안…
1
조르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27
415
511
889회 시 토론 ㅡ 동병상련/코너리님
1
조르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27
435
510
890회 토론용 시ㅡ겨울 연가/조르바
1
조르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08
379
509
생활의 상자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09
314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Copyright © mulbit.com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