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36집/남금희 5편(수정 후) >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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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 36집/남금희 5편(수정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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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박물관 외 4편

남금희



사직서를 내자
달아나던 시간들이 열없이 멈춰 선다
짐을 꾸리며
가장 크고 무거운 짐 덩어리는
유에스비 안에 옮겨 담는다

십 수 년의 기록이 사뿐히
방을 바꾼다
종이 한 장 없이

클릭 하지 않으면 되살아나지 않을
유물들이 깔린
여기는 구름의 박물관
날마다 문 두드리며 씨름하던 몸이
식은 커피처럼 적막해지는 사이

구름 한 점 속에 또 다른 구름이
열리고 닫힌다



가을장마



집을 자주 비우는 아내에게 삐쳐서
집을 나왔다
골목길 내려와 가게 앞 처마에 멈춰 서자
비는 소강상태
가방을 멘 학생들이 두런두런 지나가고
마주 오는 아주머니 우산이
묵직한 시장 가방 쪽으로 기울어 있다
물웅덩이가 파인 아스팔트 위를
한 사내가 바짓가랑이를 거머쥐고
허둥지둥 횡단한다
차가 경적을 울리자 물보라도 따라붙는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로수 늘어선 길 끝을 바라본다
멀리서 보면 모든 게 풍경이다

어디를 돌아도 길은 이어지고
바람에 후드득, 풀 죽은 비꽃들 떨어진다





협착, 스토커



그의 주파수는 잘 잡히지 않는다
밤새도록 컴퓨터와 씨름할 때
밥 때도 잊고 거리를 쏘다닐 때
슬쩍, 그가 인기척을 보인다

그는 가끔 경고음도 울린다
못 들은 척 황급히 달아나면
번개 치듯 허리를 낚아챈다
땅이 기우뚱한다

등줄기가 타들어가는 암흑의 긴 터널
마취된 시간은 안부를 묻지 않는다

며칠 후 아침이면 그는 사라지고 없다
점점이 구름 거느린 하늘은 야속하고

나이 들수록
여우처럼 헤헤거리며 그의 눈치를 본다
흐느적대며 눈물 냄새를 맡는다




곡비 생각



나 그럴 수 있다면 다음 세상에는
곡비로 태어나리
예서 못다 운 속울음
거기서 실컷 울어 제끼리
회한의 봇물 터뜨려
절로 취한 노래는 구성지게 흘러가리
무릎 꿇고 울다가 서서도 울리
뒤돌아보면서도 잠자면서도
쌓인 눈물이 죽은 자의 영혼을 깨우는
사자후가 된다면
아, 그렇게 되면 아무도 나를 청하지 않으리

그러니 나, 아니 태어나는 게 좋으리
밤하늘 별똥별처럼 스러져
어둠 속에 잠기고 말리
죽음보다 깊은 잠의 세상
눈물에 부푼 손들 잡아나 보리
먼 데서 나팔소리 울린다면
못 이기는 척, 눈 한 번 떠 보리




* 곡비(哭婢):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상을 당했을 때 상주 대신 곡을 하는 노비.




허공의 집




이사 올 윗집이 공사를 시작했다 아침 허공을 찢는 망치질 굉음 이튿날 따발총 소리 쉬는가 싶더니 오늘은 탱크가 바퀴를 굴린다 으깨고 비튼다 벼락 치는 산꼭대기에 혼자 선 듯 고꾸라지다가 마침내 올라갔다 벽이 해체된 뿌연 먼지의 집에서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팔딱거렸다

문을 밀치고 들어간 창 넓은 커피숍 구석진 의자에 몸을 던진다. 타박상 같은 둔한 통증이 저만치 머그컵에 가닿는다 왕관을 이고 물결머리 늘어뜨린 초록여인이 슬몃 입꼬리를 올린다 빈 종이컵처럼 나동그라질까 묵직하게 곧추앉으며 위아래 없이 모여 사는 풀꽃들 이름을 중얼거려본다 벌판까지는 여러 갈래 길이 있고 바다가 보이려면 더 멀리 가야 한다

우중충한 구름장 위에서 하늘은 오후 내내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퍽퍽 얻어터지는 구름 비늘들 문을 나서자 떨어져 내린다 제법 얼굴을 간질인다 바람이 어둠을 몰고 달려오자 북적대던 세상이 얌전해진다 한밤쯤 되면 길들의 경계는 흐려질 것이다 누울 자리가 참 많아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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