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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9 07:08

36집 원고 / 정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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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를 얻다


노을을 삼키는 꽃의 주변은
저녁이다
저토록 푸른 하늘도
번개와 천둥소리로 몰려오던
때가 있다

겨울나무는
무성한 초록의 잎이
달리던 가지의 허공을
품고 있다

지금은 담았다 쏟아버린
그릇의 내부처럼
텅 비어 있지만

흘러간 시간은
어둠과 번개와 천둥
있다가 없어진 것의 쓸쓸함을
받아들이는

그저 너라는 그릇의
둘레를 만들었다


청포도


열매는 익으면서
붉게 더 짙게 물들어간다

너는 가득 차올라
가득의 그림자 드리우지 않는다

떫은맛이 보여주는 연둣빛
풋것의 얼굴

잘 익어서
덜 익은 모습

새파랗게 익은 포도는
철들지 않은 어른 같아

천진하다




풍경 소리


지나가는 구름과 산벚꽃
부딪는 소리인가
온전히 바람의 소리인가

바람이 불지 않으면
피어나지 않을 소리

그는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왜 라고 묻는 대신
그렇군요 라고 말한다

누생을 돌아온 인연
가만히 끊어 보내는 말

벚꽃향 맴도는 처마 끝
사라져 들리지 않지만
들을 수 있는 소리

바람 없이 홀로 우는
풍경 소리를 들은 적 있는가



분홍방


봄날의 온도와
햇볕의 두께 바람의 길이를
재단하면
신호를 기다리던 수 천 개의
분홍방 문을 연다
벚꽃 아래 사람들
그늘 마져 분홍이다

얼었던 마음 자잘하게 녹아
환한 색유리조각으로
흩어졌다 모이는
만화경의 봄

흔들어 돌리면
펼쳐지는 슬픔도
또 한 번 돌리면 기쁨
그곳의 이별도 만남도
은근한 연속무늬

피었다 지는
몇 날
빌려다 보는 만화경의 봄


사춘기


하늘 매 발톱꽃

줄기 끝 우뚝 매달려
뿌리를 내려 다 본다

코뚫이 노랑머리 찢어진 청바지
뿌리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땅속 깊이 묻힌 뿌리의
노역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오직 하늘을 바라보는 꽃
청보랏빛 매발톱이 햇살에 빛난다

달아나려는 힘과 붙잡는 힘
밀고 당기는 긴 줄다리기

배반의 찢어지는 소리끝
꽃이 핀다



앉아만 있네


단 하나 뿐인
것을 주었네

아무것도 없네
텅 비어 있네

내 마음 그에게로 보내고
이렇게 앉아있네

부디
돌아오지 말아라

하나 뿐인
마음을 주고

이렇게 앉아만 있네



바람호수

삼복의 더위는 안개처럼
완강한 벽
피해 걸어가다 문득
발을 멈췄다
나무와 풀들이 짙푸른 소리로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의 그림자

칭얼대는 아기를 태운 유모차기 돌다가고
낮달이 쉬었다 가고
새소리 유난히 맑은 곳

아직 사람들의 살갗을 스쳐가지 않은
맑고 천진한 호수

없는 듯 있는
깊고 서늘한 침묵의 둘레

벤치 하나 놓여 있다





눈만 남은 가을

들어오고 나가는
이삿짐을 본다

살았던 집보다
더 작은 북향의 집으로
가는 이사

버리고 갈 것이 너무 많아
밤마다 뜬 눈이다

큰집 창문에 비스듬히 기댄
잎이 넓은 웃음과
고전무늬의 큰 부채 살 같은
생활의 격조도 버려야 한다

자고나면 길위에
나비되어 흩어지는 수북한 가랑잎들

있어야 할 곳에서 떨어진
아름다운 것을 밟으며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던
마음이 밟힌다

분꽃 씨앗처럼 까맣게
눈만 남은 가을



무논


가지런한 못자리에
하늘이 비친다

양식이 될 어린 모들의 잠이
구름 속에 혼곤하다

하늘의 덕은
땅을 통하여 들어난다

쨍쨍하던 땅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산비탈 어느 집 논에
물이 말라 있는가 보다

푸르게 흐들어진 유월의
무논 속으로 들어가면
문득 발아래
하늘이 밟힌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문화생활, 찬장에는 몇 개의 그릇이 놓여있다 밥사발과 국그릇에는
분홍 꽃이 두어 송이 피어 있고 어느 숲속인지 사슴 한 마리가 먼 곳을 바라보고 서 있는 접시도 있다 거실을 오가다 반짝 눈이 마주치면, 넉넉지 못한 살림에 아름다운 것을 헤아려 아리고 쓰라린 가슴에 붕대처럼 대었을, 지금 한 뜸 한 뜸 누비듯 바라보던 그 알뜰한 눈길 끊어진 채, 어루만지던 손끝 사라졌지만 그 때의, 그곳의 어머니와 자주 만난다

즐문토기의 무채색 같은 어머니의 사랑, 접시꽃 꽃대위의 흰 접시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그윽해 지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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