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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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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2 16:41

36집 원고 / 전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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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


아버지는 내일 돌아가셨다

머위와 방풍을 산다
봄나물은 약이라는데
혼에게도 약이 될까

향이 타는 봄
목련꽃송이를 만져본다
맞대 부빈 살의 감촉
그날의 당신처럼 차다

이처럼
차가운 생명도 있다
매화 산수유 고래 상어
둘러보면 사방에 가득하다
목덜미에 감기는 바람에도
서늘한 기운이 돈다

오래 전
다른 생명이 된 당신
오늘 밤 우리 곁에 와
더운 묏밥에
식은 온기를 데운다



나팔꽃이 입을 다무는 때


죽은 당신이
전화를 걸어 대뜸
오후 세시라 한다

무언가 다 놓친 느낌
빨래를 널기에도
외출을 하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

나팔꽃도 서서히
입을 다물어
침묵으로 들어가는데

당신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게 많아
남은 빛에 기댄 심정이
꽃시절 다 보낸 나무 같아서

사랑하기에도 이별하기에도
영 늦은
꿈 속보다 더 적막한
꿈 밖

이 세상에 없는
당신도 근심하는
그 시간



비둘기처럼


길 위에 활짝 펴진 날개
아주 깊은 곳을 향해 가는지
미동도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의 공포
비켜 갈수록 가로막는 주검을
펄쩍 뛰어 넘는다

삐끗.
접질린 마음이 시큰하다
또 몇날 밟힌다

얼만큼 다져야 저 길
길이 될까
도처에 널려 흔한 풍경

비둘기처럼
구구 거리는 적막을 안고
풀잎들 가늘게 떨고 있다
내 그림자 더욱 어둡다



접시 꽃


접시를 꺼낸다
어둠에 묻혀 있던
깨끗한 접시

수없이 차렸다
거두었던
식탁위에

넘치게 바람을 담고
햇볕을 담고 빗방울을 담고
나비 한마리를 초대하는
짧고 긴 몇날

천개의 손이
천번을 오가며 빚은 접시는
흠결마저도 완벽해

가장 가벼운 식탁에
가장 풍성한 접시를
공중이 받치고 있다

밤새 퍼 먹은 달의
배도
둥그런 보름이다




빨간 바탕에 검은 점무늬 등


아이가 등에 멘 가방을 벗자
무당벌레 한 마리 붙어 있다
저가 가방을 메고 온 듯
꼼짝하지 않는다

빨간 바탕에 검은 점무늬
날개를 펼치자
화려한 등이
바람을 밀어 올린다

신명나는 몰아의 경지
작두도 타고 쌍칼 번쩍거리는 판을
휘휘 날더니
벌써 다른 영을 입었는지
온데간데없다

저 쪼그만 등이 정말
가방도 아이도 메고 왔나보다
비밀한 세계의 틈을
들추며 날아다니는
굿판이 무한대
허공이다



그리운 앵두


밤 사이
앙증맞고 어여쁜 입술
다 떨어졌다

입술을 잃고
말이 뚝 끊어진 나무
간 밤
속수무책 흔들려
이별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건
물려받은 내력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는
오래된 습관에

그만 앵돌아진 앵두

그토록
달콤하고 화사한 입술이
쪼그라들고 짓물러 버렸다

앵두나무의
바닥이
한자나 깊어 보였다

누구나
한 번쯤 닿아 보았을
어둔 바닥



해를 뭉쳐


아침을 긁었다
솥에 눌러 붙은 아침을
동그랗게 뭉쳐 던졌다

해 받아라 해

엄마는 날마다
노란 해를 뭉쳐
우리들 입에 넣었다

매일 입 안 가득
해가 떠 올랐다
삼킬수록 환하게 타오르던 해

아무도 손대지 않은
바람과 공기를 요란하게
흔들며

집안에서 가장 가벼운 엄마가
가장 무거운 무쇠솥
밥의 바닥을 긁었다



저무는 힘


뽑아도 뿌리 채
뽑히지 않아

도마뱀처럼
제 몸 일부 뜯기고도
끄떡없더니

움켜쥐고 드잡이 했던
내 손아귀 힘 비웃 듯
깡, 마른다

질긴 근성도 푸른 함성도
사라진
몇 가닥 뼈대로 서걱이는 풀

사방 앙상한 몸을 흔드는
이별의 날들

풀 한포기도
비우는 힘으로 가득한 가을
자꾸만 뒤돌아 보게 하는
저 쪽


그늘이 햇볕을


들개 한 자루 부려 놓고
방앗간 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할머니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가볍고 동글동글한
들깨 같았던 사람들

그늘에 앉아 그늘을 만지며
튀어나간 낱알 하나도 주워 담았던

작은 세계를 압착해 나오는
노란 기름을 보며

짜야 나오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 생각한다

할머니의 젖과 엄마의 젖
나의 젖이 그랬던 것 처럼

끊임없이 유전하는 일에
생명에 줄을 대는 일에
함께 했던 작은 몸들

돌아보면
그늘이 햇볕을 힘 껏
누르고 있다


즐거운 거리


두 마리는 새끼
어미는 떨어져 앉아 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 안에서

새끼는 즐겁다
뛰고 구르고 부딪히고
슬라브 지붕 공기가
통통 튄다

보도블록 사이
절로 돋은 풀처럼
나고 자란 길고양이

도시 한 구석
콘크리트 바닥에
발자국을 찍는다
울음을 섞는다

폭신한 새양말짝 같은 새끼와
비쩍 마른 어미의
앞날을
백일홍 꽃잎이
화사하게 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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