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
이제 그만 안녕하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뜻밖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들어와
쌓여있던 빛이
무너져 내리면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차마 놓지 못하는 손
기차는 떠나고
미련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가 보지만
길섶의 풀들이 오래
손을 흔들었다
저녁노을이 붉었다
빙산
토마토를 갈아서
주스를 만든다
그 안에 자두 두 개를 넣었지만
마시는 사람은 모를 수 있다
멀리있어 자주 만날 수 없는 사람
키 만큼 쌓아 둔 하고 싶은 말
만나서 건네는
밋밋한 인사 속에
녹아있는 애틋한 마음
수면 아래 잠겨있는 덩어리
내 보이지 못한채
안녕을 하고
또 다시 쌓아가는 말
자두가 섞인줄 몰라도
그가 마셨으니
아쉽진 않다
질긴 끈
켜켜이 먼지 앉은 묵은 것들
정리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한때 살갑게 정 주던 물건들
마루에 나와 앉았다
와인 잔에 시선이 머문다
앞으로 건배할 일이 생기면...
먼지만 닦아 도로 넣는다
저마다 사연을 들고 나와
더 머물고 싶다고
치맛자락을 잡는 추억들
잘라내기 힘든 때묻은 시간
다시 끌어안으니
또 넘치게 한아름이다
잠시 밖으로 나왔던 것들
제자리로 돌아가고
정리가 끝났다
고향의 봄
누가 하모니카로
봄을 불고 있다
어머니 떠나시던 그 해
병원 정원 벤치에서
손잡고 나직이 불러 본 그 노래
그 날은 처음 만난 듯 넓고 깊었다
노래 끝나고 어머니는
잠시 고향으로 산책 떠나고
나도 따라갔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
무쇠 솥에 끓어 넘치는
밥 냄새가 있는 고향
거기도 진달래가 피어있었다
오늘도 맑음
아파트에 불이 났다
비상벨이 울리고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소방차도 왔다
까치는 입을 다물고
동그랗게 눈을 뜬 민들레도
그 집만 올려다 보았다
진종일 놀이터에서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고
대낮 아파트 화단에서
방뇨도 서슴치않는
열네살 정신지체 그 집 딸이
불을 낸 것이라는 소문이
바람결에 떠 다녔다
잡고보니 방화범은
오래된 김치냉장고
잡히지않는 헛소문에
지친 엄마가
쳐다 본 딸의 얼굴은
오늘도 맑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