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서다
그는 조용히
나에게로 와서
할 말이 있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냥 갔다
그 사람의 뒷모습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 서서
그의 앞길에
먼 눈길 보내는
길지 않은 시간
엷고 부드러운 것이
건너간다
점점 멀어지는 그
꽃은 보이지 않는
먼 곳을 향해 서 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누군가가 있다
그리움
아기가 태어나듯 몸보다 작은 것은 낳을 수 있다 크고 넓은 것이 안에 들어 있어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내부를 펼친 듯 차지하여 웅성거리는 덩치 큰 이것, 말이 되지못해 갇혀 있다
안에서 씨를 뿌려 안에서 자란 수령이 높은 나무같이, 뻗을 대로 뻗어 가슴을 꽉 메운,
낳으려 해도 낳아지지 않는, 뼈와 살까지 파고들어 층층이 무늬가 된, 경사지에 서 있는 투명하고 환한
탑이다
사이
그 사람의 향기
사랑하는 이에게 날아가
닿지 못하는 그
간격 말인가
소리 없는
간격 속에서
비가오고
바람이 불고
해가 뜬다
틈 사이에는
기울어진 달빛이
스며들거나
먼지나 티끌이
쌓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은 꽃이
피어
옹알이 같은 향기가
부족한 허릿단
덧대어 있듯
가녀린 팔을 뻗어
기어이 닿아
흘러내리지 않는
옷처럼
꼭 맞는 사이가
된다
울컥하는 봄
한꺼번에
산수유 개나리 자목련 진달래
토하듯 쏟아낸다
그곳에
무슨 일이라도
너무 빨리 지나가는
뜻을 모르는 자막처럼
기다릴 틈도 없이
피어 버렸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천천히 오래
읽고 싶은 봄
활자가 포개어지거나
띄어쓰기가 안 된
페이지 같은.
만개
한껏 벌어진
꽃의 그릇이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담긴
연분홍, 넘쳐흐른다
벚나무 아래 사람들
몸을 담근 듯 조용하다
아늑한 분홍방
꽃의 말이 들린다
가득히 담긴 것은 늘
위태로워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못 한다
어느 날의 바람이
휙, 쏟아버린다면
헤어진 뒤에야
헤아려지는 사랑의 크기처럼
담을수록 깊어가는
그늘이다
나무 아래 앉아
살다가
부딪친 곳
이곳 일 줄이야
여기는 외로움과 닿아 있다
나무에 앉아도 새가 아니고
꽃밭에 들어도 꽃이 아닌
여기는 어디인가
연습도 없이
제 모습을 잃고
저를 찾아 다닌다
변한 것 마저
그리워지는
나무아래 앉아
먼 구름 바라보는
여기는
또 어디인가
정선 가는 길
능선을 한 겹 또 한 겹 겹치며 같이 가는 산, 높은 것도 숨찬 것도 첩첩이다 가도 가도 산이다 하늘이 동그랗게 뚫리는 곳, 빨아들이듯 꾸역꾸역 넘어간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길이 있어 정선 아리랑처럼 구성지게 휘 늘어진다
옥산장 할머니의 아리랑 고개 같은 길 살아도 살아도 쉬워지지 않는 삶 아우라지 강가에서 실컷 울다가 그녀를 비춰주는 돌 하나 주워서 돌아오는, 그렇게 모은 돌이 평생이 되고 할머니의 생애가 되고 강원도 문화유산이 된, 산이 깊다는 것, 첩첩이라는 것은 들어온 길 보다 나갈 길이 더 멀고 험난해 그 자리 주저앉으며 돌처럼 무늬를 그리는 일, 깊다는 것은 돌아 갈 수 없는 지점에서 더 깊이 잠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