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사
남금희
남편에게 타박 맞고
베란다에 쭈그려 앉아
창밖을 본다
보란 듯이 뛰쳐나가고 싶지만
갈 데도 없다
봄은 왜 또 흐벅지게 찾아와
네온 불빛 속에서 어른대는지
나무들 쿨럭쿨럭 기침을 한다
세상이 뿌옇다 못해 몽환적이다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 빈 둥지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주던 어미새는
보이지 않는다
새끼들은 제 머리통보다 더 크게 주둥이를
쫙쫙 벌리더니 모두 떠나가버렸다
천리를 날아 나를 찾아온 모래 손님들
언뜻, 불빛에 몸 포개는 나무들을 본다
2. 여름비에 묻다
아픈 허공이었을까
창밖 화단에는
장미송이들이 비를 맞고 있다
비가 와도
한 닷새 오지 않는다면
네게 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물꽃 튀는 아스팔트 위를
우산을 받쳐 든 여인이 조심스레 걸어간다
비가 와도
진종일 오지 않으면
네게 전화하지 않겠다고 마음 고쳐먹는다
쇠사슬 끊어지듯 툭, 툭,
터지는 슬픔의 뿌리
……눈 감고 올려다보는 하늘
너를 돌려세우는 안간힘으로 젖어들고
빗소리에 마음 뜯기는 저녁 무렵
조금씩 발을 뻗은 나무들이 출렁거린다
3. 눈 먼 자의 노래
메마른 광야, 떨기나무가 불타고 있어요
불은 붙었는데
타지 않고 있어요
신발을 벗으라는 목소리 들려요
숨어산 지 사십 년
이대로 주저앉아 화석이나 되려 했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라고
신발을 벗으라 하시는지요
가진 것은 지팡이 하나
바람 속으로 뛰어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어요
눈을 감아도 들리지 않고
가슴을 쳐도 울리지 않아요
사막을 걷다 지친 낙타처럼 무릎이 꺾여요
모래바람은 물결쳐 자꾸 능선을 옮기는데
발이 푹푹 빠져요
길은 옛적 길
그 좁은 길은 어디서 나를 찾고 있나요
너무 늦은 내게 누가 물을 주나요
동풍이 불어 바닷물을 가르면
물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올라가는 길이 있어요
그 길 찾아 한사코
이 광야 걸어야 해요
이 사막 헤쳐가야 해요
4. 남몰래 고이다
가스레인지 철판을 들어내고야 말았다
주물 대가리를 연결하고 있는 투박한 관들
그 속에 언제든지 발화할 수 있는
터질 듯한 기체들이 흐르고 있다
겁 없이 찰칵대며 음식을 굽고
맛나게 먹고 잘도 살았다
녹슬고 비린 신경망들
솔로 문지르면서
탈탈 털어내면서
아직 쓸 만한지 살핀다
위태한 시간들은 늘 알아채지 못하게 고여 있었다
시름시름한 질병들
개망초같이 널려 있는 근심들
한방에 날리려고 생각하지만
다 잡을 수는 없겠다
발 없는 것들이 고인다
별일 없이 늙어간다
5. 타자들
날이 밝자 취사가 끝났다
식탁에 놓인 김이 나는 밥
식기 전에
한 사람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신다
얼굴이 푸석하다
다시 식탁을 훔치자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
짧게 끊어지는 몇 마디
그릇 부딪는 소리에 현관문이 열리고 닫힌다
남은 음식들 냉장고에 자리를 틀고
세탁기가 돌아간다
청소기가 굉음을 낸다
햇살은 거실을 점령하고
먼지입자들처럼 떠돌아다니는 기억들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거나
(강아지마저 없다면)
찻물을 화분에 들이붓기도 한다
창밖에는 차들이 자꾸 달아나고
뒤통수를 쪼아대는 시간
날개가 퇴화된 도도새가
길게 목을 뽑고 뒤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