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이 날아간다
새가 날아간다
색깔이 날아간다
어머니 시집 올 적
모본단 저고리
연분홍빛 날아가고
저고리만 남는다
검은 머리도 가고
언 분홍
찢어진 노랑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놀란 연두
마저
날아가 버린 자리
무채색의
그늘이 남는다
에로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헛헛할 때 책을 읽는다 흩어진 감꽃을 주워 실에 꿰듯 산만한 생각을 한 줄에 모으는 것은 공부다 제목을 따라 응시하고 몰입해 가는 일은 주제를 따라가는 명상의 길이기도 하다 그것이 먼 길이든 가까운 길이든 어느 지점에서 불쑥 말쑥한 손님 같은 기쁨과 만날 때 그것은 애무와도 같은 것이다
고통스럽게 몇 날 몇 밤을 달려 가 몇 줄의 감꽃목걸이 같은 시와 만날 때
*애무는 비로소 살이 된다
*애무는 몸을 살로 만든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 옴
장갑을 흘리다
혹한의 긴 겨울이 있었다 손은 사람의 마지막 격전지, 손이 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온기를 느끼듯 그녀를 덥석 잡고 순수한 털실의 따뜻함을 장갑으로 꼈다 혹한은 춥지 않았고 얼음은 더 이상 얼지 않았다 연분홍 봄의 옆얼굴이 보였다 더 이상의 겨울은 없다고 생각 될 때 봄이 길었다
어느 날
두툼하고 예쁘지도 않은 그녀를 햇볕이 부서지는 찻집에서 흘렸다
수 십 번의 겨울이 오고 또 갔다 그녀를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은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맛
백년이 넘었다는
유명한 우동
국물이 생명이다
펄펄 끓는 고개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은 것이다
살아가는 것도
세상 속으로 자신을
풀어 놓는 것
뜨거운 우주 안에서
한 여자가
그의 아내가
그들의 어머니가
풀리고 풀린다
속을 다 비울 때 까지
그 맛을 위해
수백 년 전 그 일을
아직도 하고 있다
순자
겨울에도 순자
여름에도 순자
단벌의 옷 같은 너
부모님 주신 이름
그 속 깊고 깊어
얇았다 두껍다
가볍다가 무겁다
어느 해는 겨울이 힘들었고
어느 해는 여름이 고비였다
낮은 곳에서는 오르고 싶었고
높은 곳에서는 내려가고 싶었다
순자
내부를 모르는
단 한 벌의
너는
홑이 아니다
파 꽃
아버지를 만나러
산소에 가는데
못 보던 비석
몇 개가 보인다
파 꽃처럼
우뚝하다
꿋꿋이 살았지만
절레절레 머리 젓는
매운 속은 비어
짙푸른 이파리에
하얗게 핀 독기
한가운데
우뚝 솟아
꽃이라 하기엔
오래 앓다 나은
흉터 같은
알알이 박혀 있는
별빛 구부러진
글자들
산 아래 새로 생긴
비석 몇 개
피어 있다
유치원 놀이터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와서
그네를 탄다
힘껏 구르니
그날에 닿은 듯
한 점 흰 구름이
피어 오른다
노인은 가고 없고
빈 그네만
왔다 갔다 한다
아직도 흔들리는
저 그네처럼
가고 없는 날 뒤에서
이토록
어른거리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