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현 자귀나무외 6편 >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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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25 07:29

김세현 자귀나무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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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귀나무

잠시 잠이 들었던가
분홍빛 향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분솔 같은 자귀꽃으로
내 풋잠을 깨우던 사람
자귀나무가 서 있던 커피숍의
작은 연못을 건너온 그의 미소가
커다란 창에 물결처럼 파문진다

목마른 봄 끝, 자귀꽃은 녹아
다시는 내 뺨에
분홍빛 연지를 바를 수 없지만
뜨거운 여름이 지난 자리에
자귀나무도 사라지고 없지만
자귀꽃 피면
나도 몰래 분홍물 드는 내 얼굴

아직도 연못을 건너오는
그의 그림자


2)해인사

실직한 사내와 눈 덮인 해인사를 찾았다
키만큼이나 눈이 쌓여 나무도 돌도 지붕도 높아 보였다
우리는 대웅전을 향하지 않고 극락전 귀퉁이 노란 햇살에 몸 기댔다
겨울 칼바람 속에 목이 꺾이는 그의 말,
그가 뿜는 입김이 안개처럼 눈시울을 가렸다

비개덩이 같이 근 수만 나가는 그가
역광으로 떨어지는 겨울 해 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

댕그랑,
허공에 몸 날리던 풍경의 마른 물고기가
적송에서 떨어지는 한 덩이 눈을 받아

바다 같은 해인의 가슴에
사내가 걸친 고통과 남루를
희게 채색하고 있었다


3)꽃피다


낡은 빌딩 3층 계단 끝에 홀로 앉은 철쭉화분
고독과 무료함에 나날이 시들어갔다
어쩌다 꺼죽한 남자가 주는 한 바가지 물과
때 낀 창문으로 들어오는 흐릿한
햇볕 몇 줄기

발 아래로 자동차가 지나가도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허접한 실내

적막에 삭아가는 줄기를 보며
그만 흙속에 눕고 싶다고 멍하니
창을 바라보던 그 때
세차게 내리치는 빗속에서
온몸을 흔들며 창문을 두드리는
플라타너스
웃으며 손뼉 치며
‘나는 너를 보고 있었어’

막 시들어가는 메마른 어깨에
연분홍 꽃을 화르르 달고
철쭉이 창을 향해 야윈 손을 뻗었다


4)플라타너스


동부교회 앞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는
중국 서커스단 같다
한 사람의 머리 위로 여러 사람이 올라가
펼치는 묘기는
인간이 짊어진 죄의 무게와 같아 보인다

뼈마디마디 일그러진 광대뼈 사이로
눈알이라도 튀어나올 듯
온 힘을 다해 버티는 긴장이
녹아내리는 하지를 팽팽히 당긴다

한사람이 받쳐주는 몸의 탄력을 딛고
그 위로 일어서는
사람 위에 또 일어서는 사람들

맨 꼭대기 사람 팔이
나뭇가지처럼
하늘 향해 치솟을 때
맞잡은 손과 손사이로 전류가 흐르듯
불을 켜는 몸들

우주의 문이 열리듯
절정의 빛나는 순간이 없었다면
기예의
목마른 여름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5)그해 봄, 판소리

수성못 근처에 입술 하나가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 벚꽃처럼 만개했다 겨우내 죽은 듯 누워있던 나는 마음을 빗질하여 입술의 근원을 찾아 헤맸다 그것은 그냥 입술이 아니라 사람 애간장을 녹여 끝내는 말라 죽게 만드는 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음파를 통해서만 상상하던 그 입술을 만나 꼭 그 소리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살을 에는 꽃샘바람이 못 바닥을 치던 날 밤 술에 취해 철벙철벙 못 계단을 내려간 나는 나목 우듬지에 걸려 소리를 찢고 있는 입술을 보았다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명검이 한 순간 빛이 듯,
차갑게 목숨을 베어내는 그 소리

변심한 애인을 찾아가 가슴에 열 고랑을 파놓고
돌아온 그녀의 손톱 밑에서
못 위로
벌겋게 번져나가던 핏물

끝내 몸을 던진 넋이 떠돌다
쉰 소리로 삭은 달밤
수초에 엉겨 빠지지 않던 그 울음소리

벚꽃 떨어져 눈발 같이 회오리치는,
진물 흐르던 봄이 갔다


6)로드 킬


마지막 이승을 건너가는 개의 울음이
꼬리 끝에서 떨고 있다

분홍빛 대리석 속에 안겼다가
하루아침 나락으로 떨어져
서툴게 맞은 세상
첫 나들이가 로드 킬이라니!!

자동차들 여전히 쌩쌩 가속을 높이고
바람이 어깨를 두드린다
금세 말라붙는 피
구름이 무거운 엉덩이 낮출 때

어디선가 날아 온 노랑나비 한 마리
노을 든 개의 코끝에 앉아
허공에 박힌 눈동자 쓰다듬듯
연미색 날개를 파닥거린다


7)그해 11월


아궁이엔 연탄불 대신에 구정물이 가득했다
노름에 미친 남편은 자정에 다시 들어와
쌀독 깊이 감춰둔 월급 뭉치를 들고 사라졌다

눅눅한 한기가 이불 속까지 파고드는 방
떨어진 문풍지에서 송곳 같은 바람이 불어도
어린것이 자질어 치듯 울어도
길이란 길은 다 끊긴 듯
멍하니 바깥만 바라보는 그녀

창 밖 전봇대에서 흘러내린
전깃줄 그림자
그녀 목에 오랏줄처럼 감기고

저 하늘 꼭대기
어둠을 패대는 푸른 번개가
사신의 시선처럼 흉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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