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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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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가 사유상

울릉도 도동항에는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 있다

송곳 같은 바위 끝
홀로 앉아
이천년을 삼매에 든 그는
지난여름 폭풍에 한쪽 팔마저 잃어
얼굴만 남았다

척추가 녹아내리고 온몸에 불길이 지나가도
화두 하나로 세운
一念

이제는 탄생의 기억조차 지워져 삶과 죽음의 문답이 따로 없다

은은한 미소만
저 먼 대륙까지
불어가는 바람 깃에 묻혀 갈 뿐

2)내게도 봄이

서울서 수련회를 마치고 지친 몸을 KTX에 실었습니다
유리창에는 커다란 하현달이 삶은 호박처럼 누렇게 떠 있었습니다
여전히 밤 바람은 차가웠고 창 밖에는
밤에 피는 꽃처럼 나트륨 불빛들이 둥둥 떠다녔습니다

나는 진농한 봄 언저리에 서서
자꾸만 저물어가는 생을 회의하면서
전혀 꽃 필 것 같지 않는 봄의
거친 등피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아, 그 순간, 무거운 바위를 들치고
노오란 싹이 솟아오르듯
그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대는 그대가 사는 남쪽의 꽃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곳은 아직 춥지만 온산에 매화가 만발하다고
어느 곳에는 아직 꽃몽오리가 쥐눈이 콩처럼 웅크리고 있고
양지바른 어떤 곳에서는 벚꽃도 폭발했다고!
그리고, 보고 싶다고

천근의 잠이 달아나고 부드러운 꽃잎들이 나를 향해 함성을 지르는 듯.....
망설이던 봄이 분홍빛으로 웅돌아 설레이면서
물결로 이는 찰나

겨울 내내 비어져 있던 허수한 마음들이
그대와의 눈부신 풍경을 담아 내게,
뜨겁게 손 내밀고 있었습니다

아, 내게도 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3)오래된 우물


애벌레처럼 몸을 잔뜩 움츠린 초승달이
우물에 들어앉아 있다

탄광처럼 어두운 우물 안은 거뭇하게 뜨겁다

원통처럼 목이 긴 우물 안에서
어린 짐승처럼 몸을 뒤채이던 달
보름날 밤, 둥실 떠올랐다

천지에 주르르 흘러내리는 양수의 비린내

눈부신 적요에 밤은 두근거리고
몸 속 어딘가를
더듬어 오르는 내 속의 강물

달이 빠져나간 우물이
늙은 자궁처럼 캄캄하게 열려 있다


4) 줄장미, 그 긴 목마름


금요일, 애인은 제 둥지로 돌아갔다
황금 같은 주말이 소롯이 남아 구석에 던져져 있다

보석도 몸에 걸쳐야 빛이 나듯
모든 것들 숨소리가 없다

애인의 숨결은 푸른 산소 같았다
한번 숨을 쉴 때마다 온몸을 휘돌아 폐를 맑게 트였다

애인이 가버린 빈방을 두드리면
목성까지 갔다 되돌아오는 빗소리

악다문 이별의 모습들이 젖어서 너덜거렸다
돌아오는 금요일엔
애인의 피라도 뽑아 빨강 장미를 심어야 겠다

숯막처럼 깜깜한 정원에다 내 피 함께 뿌려
가시로 동여매 아픈, 장미꽃이라도 피워야 겠다


5) 羽化

새가 되려고
제 몸 허물어 새가 되려고
저 소나무,
바위 끝에 섰다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날개를 들다
우지끈 부러지는 가지
들뜬 솔잎만
깃털 같이 날아간다

羽化를 꿈꾸다
떨어진 자리
관솔처럼 맑은 눈을 뜬
어린 새의 날갯짓이
절벽을 오른다


6) 외돌개

돌탑이 된 네게서
내 사랑의 빛나는 흉터를 본다

짐승처럼 웅크리고
한파에 바들바들 떨던 밤도
폭우 속에서 펑펑 솟구치던 울음도
고독이 얼마나
캄캄한 얼음이었는지
몸뚱이에 혈서처럼 쓰여진
무늬들

쭈그리고 서서 닳아가는 시간을 견디며
수천 갈래로 무너져오는 파도를
파랗게 뒤집어쓰고

사무침의 아득한 통증을 만지는


*서귀포에서 천지연 폭포를 지나 만나는 작은 돌섬

7)오래된 의자

당신이 새 의자로 마음을 옮겨 갔을 때
나는 사약 들이키듯 단숨에 시간을 삼켰다

삐꺽거리는 관절이 허리를 죄고
녹슨 못은 가시처럼 속살을 파고들었다

순종만 하고 살아온 세월

몸 속, 기억의 모서리마다
위안으로 기대오던 푸근한 일상들

그날들이 흐릿하게 삭아간다

이제 어둠 속에 낡은 뼈를 누이어
적막의 그림자로 당신에게 스밀까


8)첼로 켜는 여자 - 백남준전

첼로 絃이
벗은 사내의 등줄기를 뜨겁게 누빈다
날카로운 손톱처럼 전신을 파고 든다

후드득 튀어나오는 핏방울

가슴의 문을 열면
수천 벼랑 끝
바위를 깎아가는 격렬한 파도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녀 몸속에 들어와
신열에 떨며 몸부림치는 바다

고통을 즐기는 몸과 귀
부풀어 오르는 입술

사랑이여
누가 등 뒤에서 또 다른 너를 조율하고 있는가!


9) 서산삼존마애불

바위도 천년이 지나니 웃을 줄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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