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회
작열하는 태양을 이고 담장 밖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미는 자태가
구름을 헤치고 나오는 달 같이 환하다
어느 현관 옆 담장 가에
굵은 고사목 지주를 넝쿨로 휘감고
하늘 높이 기어오르는 요염한 자태는
전설 속에 얽혔던 너의 바람기
사랑에 찔렸던 아픔의 상처가
치솟는 생명을 향해 이젠 애절한
그리움으로 피어나
담장 밖으로 귀를 세운다
네 크고 작은 아픔의 흉터가
향기로 곰삭아 내리고
유월의 열기 속에서
네 영혼은 끝없는 기다림으로 피어
주황빛 고운 얼굴 우수가 흐른다.
둥지를 떠나면서
한 울타리 안에 갇혀
도마처럼 평생 흔적을 새겨놓고
둥지를 떠나는 날
북 바치는 슬픔을 삼킵니다
교정에
들 고양이들까지도
이젠 집고양이처럼 귀엽고
깨물면 하나같이 아픈
손가락으로 다가와
가슴 찧는 듯이 아립니다
함께 있으면
냉가슴도 용광로 속에 무쇠처럼
녹이던 이웃들의 뜨거운 포옹이
가슴 메이도록 그리워 옵니다
보이지 않던 일상의 것들이
토막토막 내 손때 묻은 자국으로 다가와
떠나는 발목 잡아 멈춰서며
풍랑 이는 바다로 향하는 외기러기
목 메입니다.
서산 마애삼존불
벼랑 끝에
지긋이 자리 잡고
세상사람 지은 무거운 업죄
묵묵히 받아 안은 저 마애불
거친 비바람 속에서
긴 시름 달레면서
누리를 물들이는 자비
우러러 하늘 받혀 이고
세월이 고달파도
오직 한 바램으로
두 손 모으고 천 년 세월을
안으로 안으로만 다지니
저 바위가 하얗게 웃는다.
결명자
내 집 앞 골목길
시멘불럭 바늘구멍 틈에
작은 씨앗 한 알, 늦둥이로 태어났다.
외줄기 끊어질 듯 가녀리나
하늘로 가지를 뻗는다
제구실 못할까 가슴 조였건만
늦가을에 꽃망울 맺어 붉은 가슴 열어
정렬로 몸 불태우고
가을저녁에 몽그라진 잎사귀 하나
저무는 놀 속에 대롱거리다가 떨어진다
사랑으로 태어난 늦둥이들만
실가지 끝에 바둥바둥 메어달려
먼 타향으로 뿔뿔이 헤어질 운명에도
대지로 향한 꿈은 부풀어
반짝이는 눈빛이 서럽다.
억새
능선 위에 푸른 하늘이고
억새꽃 피어있다
산들바람에 은파로 부서지는
옛 생각 따라가면
귀에 익은 인기척처럼 다가오는 풀꽃향기
산마루 위로 외줄기 오솔길 저만지
누가 기다릴 듯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빈산에 타는 저녁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