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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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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집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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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한계령


숱한 말들을 저 푸른 수평선 위에 풀어놓고
섬이 되어 돌아가버린

당신은 내 삶의 여름이었지
찬란히 펼쳐졌다 급히 문을 닫아버린
지독하게 빛나는 여름이었지

편편이 제 몸 찢기는 줄도 모르고
휘감아 도는 바람에 목숨 걸었던
황홀함이었지

달콤할수록 목이 마른 말들
들이켤수록 더해지는 갈증

나방처럼 뛰어들어 불이 뚝뚝 떨어지던
그 끝은 이별 이었지


ㅡ오카리나

사람의 정강이뼈로 만들었다던
오카리나의 슬픈 음율이 마음을 파고 든다

굵은 마디의 손가락과 두툼한 입술이 불러내는
당신의 영혼
좁고 어두운 구멍에서 나비처럼 튀어나온
음표들이 소리를 찾아 바다를 건넌다

별똥별이 날아간 먼 그곳,
외로운 잠에 수없이 뒤척이다 울림통이 되어버린
당신의 뼈

가슴 속 슬픔을 꺼내들고 소원을 빌어 본 사람만이
젖어서 내는
환청처럼 아득한, 먼 전생의 소리
노을 속에 떨어진
당신의 목소리


ㅡ별은 빛나건만


죽은 밀수꾼의 뱃속에서
보석들이 살아
썩은 살 밖으로 빛을 내 뿜는다

얼어붙은 몸, 틈 새로
햇빛이 기웃거리자
별처럼 반짝이는 보석들

절절 끓던 욕망도
데일 듯이 아픈 사랑도
훌훌 벗어 던지고
캄캄한 주검으로 누운 사내의
보석조각에 비치는 영롱한 하늘

온몸으로 끌어당겼던, 금빛 총총한
목숨보다 더 황홀했던 순간들

밤하늘에 박힌 푸른 눈을 빛내며 그가 숨긴 보석을 찾고 있다

단단하고 여전한 세상
지상의 불빛은 더욱 빛나고
출구를 찾아 퍼져나가는 빛의 지느러미
꿈틀거린다


ㅡ빗물 거울


빗물로 번들거리는 거리에 택시가 지나간다

빗물이 만든 아스팔트 거울에 비친
언더카바가 떨어져나간 택시
마구 엉킨 엔진이 곧 쏟아질 사람 창자 같다

시집갔다 오년 만에 돌아온 고아 정희가
아프다며 자꾸 아랫배를 가리킨다
치마를 들치며 친구들에게 한 번만 보라고 사정을 한다

아, 탱글탱글 뭉쳐 있는 뱀 같은 것들이
똬리를 틀고 입구를 앙다물어 꽉 막고 있다

마음뿐인 친구들만 모여
생피 흘리는 밤
빗장 질러 진 그녀 생을 아무도 열지 못했다


ㅡ나는 사랑을 먹는 암거미


우리는 먹이를 공유하고 순간을 사랑 하지만
무한을 굴러가는 신의 수레바퀴는
허기진 입을 세워 네 몸을 공격한다

내 혀는 네 전생에 닿아있어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네 몸은 사라지고
한 통속이 된 우리

너는 지시 한다 내 속에서 은밀히
고통으로 속살거리며
어린 것에게 네 살을 먹이라고

무지개빛 나는 팔각의 줄 위에
더욱 날카로운 향기를 풀어서
또 다른 사랑을 먹으라고


ㅡ단풍, 저 뜨거운 폭발


가을이면 뜨거워지는 나무가 있다

스스로 발광하는 심해어류처럼
몸속을 더듬어오는 농염한 빛살에
수혈 받듯 피어나는

囚人처럼 한평생
시퍼런 치마로 온 몸을 칭칭 감고
하늘 한 번 빼꼼히 올려다보지 않던 그녀

온전히 꽃피고 열매가진 것들, 천방지축
알몸 내 놓고 色물 든 옷 휠 휠 벗어부치며
폭발하는 한낮

어혈든 가슴이 터져
뜨겁게 발열하는 시한폭탄 같은
저 불덩이!


ㅡ산딸기

-욕지도

사금파리에 발이 찢겼다
벌겋게 흘러내리는


아슬아슬
거친 파도에 뒤꿈치 긁히며

아름다운 고통이
절벽을 오른다


ㅡ혁명 혹은 지렁이


안개 낀 아침
자전거 바퀴에 치어 꿈틀거리고 있었어
그 위를 철커덕!
군화가 밟아 버렸어

비가 내렸어
눈을 뜨니 땅 위에 누워 있더군
낯선 말이 두려워 웅크리고 있을 때
뽀족 구두가 내 몸뚱이를 차고 갔어

깜깜한 밤이 계속 되고 붉은 사이렌 종일 울렸어
바퀴에 깔리어 신음도 흙속으로 묻히던
그 때

두 동강 난 끈이 되어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어


ㅡ만신창이 가을


하루 종일 울었나
그녀 눈이 빨갛다

만신창이가 된 옷가지들
갈갈이 찢어 서쪽 벽에 걸어놓으니
강은 말없이 먹물 속으로 잠긴다

일상으로 기워진 석양을
구겨 버리면
썩은 밀감처럼 떠오르는 달

외발로 선 두루미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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