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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 출품작 / 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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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달

사과꽃 핀 길 건너 밭두렁을 지나니
푸석한 햇살 밀가루처럼 날리고
바람 불 때 가지가 잠시 흔들렸다
어릴 때 들은 교회당풍금소리
들길의 가지에 남아 울려난 것일까
사과꽃 핀 곳에 날아온 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린
네 신발 끄는 소리와 같았다
한적한 들길에 저물 때까지 있으면
낮달도 지나가고
예수 모습도 보였다
거기 오메 버려진 신발 한 짝,
미루나무와 바람이 있었다
풍금소리도 있었다


2 무덤

시간의 끝에 누울 때
어둠 속에 불을 밝힐 수 있다면
지난날 즐거운 순간을 모아
묘지 밖의 소나무에 걸어두고 싶다
아니면 그날들을 어둠 속에 걸어두고
절집의 풍경소리도 담아두고 싶다
바람 없는 날은 깊은 잠에 들고
가슴엔 불꽃도 없으리니


3 도종환을 읽다가,

접시꽃 당신 도종환을 읽다가
내가 산 초가집의 발그레한 불빛이 생각났다
그 낮은 집들의 정적이나 뒤란의 조밀한 그늘이며
옛길에 움튼 추억의 잔해 틈새로 피어난 살구꽃,
그것은 지금도 나를 놀라게 한다
여로와 같은 아득한 향수로 달려온다
초가집에 살던 사람도, 총성으로 들끓은 모진 세월도 지나고
이제 철조망 녹슨 위로 거미가 성긴 그물을 펼치니
시간 저 편에서 오는 아픈 감금 옛 그리움으로 풀리는구나
대장간 풀무불, 망치소리 돌담옆 우물물에 어른거리고
풀잎은 몸을 떨며 낮달은 한낮의 정적에 기꺼이 묶인다
도시 남쪽 끝으로 걸어온 나는 모래톱에 가물거리던 버들대신
이제 공장의 검은 굴뚝 녹슨 지붕 아래에 서 있으나
여전히 칡을 캐던 영덕산 무덤들 비명에 놀란
어린 날 기억 속에 사로잡혀 있다

주남지 철새가 떠난 허공에
혼자 남아 우는 나는 오늘,
도정환시집을 펼쳐 든다


4 그날 이후

그날 이후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깊은 잠은 사금조각으로 빛나던 날의
기억을 묻기 위하여 혹은 고통과 절망을
묻으려고 묘혈을 팠는지 모른다
겨울날 모퉁이 길에서 무참히 잘려나간
너의 풀꽃 같던 모습 눈앞에 어른거려
밤중에 소스라쳐 일어나던 때면
어스름 하늘엔 새벽별 빛났고
느티나무위로 내린 보랏빛여명
커튼사이로 보였어도 무덤 같은
고요 뜰 안에 가득하였다
누군가 뜰을 밟는 인기척에
나무둥지에 깃든 날짐승
놀라는 소리 들렸을 뿐


5 수평선의 여인

수평선이 바다를 가른다
점점이 앉아있는 섬과 검은 배들
갈매기 울음소리로 깨어나고
파도는 세찬 물살로 바다의 꿈을 실어 나른다
지난밤 꿈에서 본 여인은
일출의 황금 불꽃인양 가슴에 못 박히고
해풍은 그리움의 부싯돌로 절절한 불꽃을 일으킨다
불길 속의 여인은 바다를 가르듯 우뚝 서있고
나는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다
여인은 장대한 불로 수평선에 금을 긋고 지나가고
나는 그만 일렁이는 파도 소리에 아득해진다
실신한 나를 안은 여인은 창백한 얼굴로 서 있고
여인의 낯빛은 창백하게 질린다
바다는 깊은 숨 토해낸다


6 茫然한 심사

늦은 밤 비가 내린다
놋대야에 떨어지는 저 빗소리
구룡사 대웅전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 같아
옷깃 여미며 비님을 맞이한다
궂은 날 가문 날 내리는 빗소리 말 못할 반가움에
빗소리에 고된 시름을 푼다
생은 본시 덧없다
비를 반기는 돌 틈의 풀꽃처럼
부질없는 망념을 털어버리려 하나
번민의 외투는 여간해서 벗겨지지 않아
빗소리에 마냥 뛰쳐나가 꿈을 즐기듯
살아있는 목숨의 한때를 즐길 뿐
비 내리는 밤 홀로 불을 켠다


7 아내사진

개울에서 들리는 물소리
아침 뜨락을 시립게 번져간다
액자 속 아내사진이 나를 보고 웃는다
웃고 있는 사진은 분명 젊고 발랄한 여인인데,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 그렇지 못하다
아직도 그녀는 이십대 여인이고 매력적이다
다시 들을 수 없는 웃음 뒤엔 세월이
장승처럼 버티고 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 컵에 물을 따르려다,
식탁 옆엔 아내가 우렁각시로 서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그냥 돌아선다
편찮은 심사에 아내사진만 바라볼 뿐
종일 가부좌로 묵연히 앉아있었다
감나무 흔든 바람소리에도 놀라
알 수없는 수렁에 빠져든다


8 집사람

글을 쓰는 동안 당신은 다소곳이 앉아 있고
구룡사 대웅전 뜰에서도 당신은 내 옆에 있었다
외출한 사이 당신은 부엌에 들어가
저녁을 짓고 밥상을 차렸다
삶의 신산함에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와도
당신은 감꽃 같은 해맑은 웃음으로 나를 맞았다
어느 날 당신은 병실에 누웠고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까마귀 낮게 깔리는 하늘
나는 영정과 함께 당신을 묻었다
이제 어디에도 당신은 없다


9 겨울날 아침

식전 햇살이
마당에 갈꽃같이 날린다
토담의 개오동가지 저 혼자 흔들리고
시간은 일곱 시 반
조금씩 유리창 성에가 녹는다
액자 속 내 사진은
나를 보고 씨익하니 웃는다

그려 어젯밤은
바람은 좀 심하게 불었지
창. 창을 지우는 구름이 밀려가는...
어느 시인의 詩句가 생각나고
고향 도립병원 흰 벽 같은
밀려가는 구름장 틈에
지난밤 어두움이 녹아내린다
빛살도 녹아내린다

시간은 여덟 시 반
마당가에 접시꽃 같은 햇살이
개오동 긴 그림자가
담벽에다
누군가 그리다간 은박지 그림을 그리다,
흐드득 용래같이 울다 간다
그려 겨울날 아침에


- 창 창을 지우는 구름이 ...
시인 오규원 씨의 久浦氏의 一日중에서

- 용래 : 시인 박용래


10 고추잠자리

수숫대에 앉은 고추잠자리
떼 지어 철망에서 가지에서
해맑은 하늘로 날아간다
고추잠자리 집들 담장을 기웃거리다,
바람결에 가을 내음 묻혀오고
가지에 달린 열매를 떨어트린다
들판에서 잘 익은 열매,
가을햇살 쪼인 바이올린 고운선율인가
태평양바닷가 쪽빛포말인가
릴케가 남쪽강둑길을 걸어간다
햇살 눈부신 날 갈잎에 반짝인
물방울 투명한 것들 속 시간에서
나를 스쳐간 지난날이 그립고
지나간 그리움은 눈물로 쏟아진다
아득히 먼 곳 지평이 열려가고
내 두 팔로 너를 안아본다


11 눈 오는 날

눈 오는 날 저녁 솔숲에 우는 바람 그치고
행길가 외딴 주막집 등불 발그라니 저 혼자 불타라
하동에서 호암은 십 여리 오는 눈도 먼 십여리
눈은 내려라 눈은 쌓여라

이내 몸 묻혀 사는 오 갈 곳 없는 사오년
섬진강 앞 물가에 누워도 사는 나날 한숨이라
연분홍 앵두꽃 흐들진 봄날엔 지는 꽃잎에도 설움이고
뛰쳐나가 마시는 주막집 술잔에 임의 고운 얼굴,
어리우나 오늘같이 눈은 내려라
어느 때나 눈물은 흘러라


12 대추밭에서

상암다리 건너편 외딴 주막에서 사온
수무병 막걸리, 자전거에 싣고 달린다
푸른 송림을 지난 산 아래 대추밭
어머니는 이고 온 새참 함지박을 내리며
강 건너 먼 곳 마을을 바라본다
봄날 아지랑이 같은 아련한 그리움이
강촌바람을 타고 가오리연으로 날아간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후두둑 대추알 떨어지는 소리, 저녁마을을 흔들고
경운기 한 가득 대추자루 실려 밭길을 떠나간다
품앗이 온 동네아낙들 떠드는 소리때문인가,
아버지가 마시던 막걸리 한 사발에서
소쩍새 한 마리,
푸드득 날아가고 있다


13 그녀음성

차고 투명한 물방울로 너를 본다
너는 단아한 모습 흩트리지 않고 돌아선다
감성의 사금파리에 부딪쳐 빛나던
햇살이 돌아나간 지난날을 불러낸다
불러낸 곳마다 그리움이 넘쳐난다
미루나무에 앉은 새 한 마리 날아가고
단아한 너의 모습 날선 칼날 위에서 들어올린다
서정의 광휘한 불꽃 너를 둘러싸며
눈부시게 하고 불꽃의 중심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 음성의 일절 오늘날에도 들린다
석양의 성당십자가 길게 눕고


14 굴복 하였다

벽에 힘주어 금을 긋는다
지날 날 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바로보지 못한,
폭풍이 지나나간 순간을 혹은
초경을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눈물 위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번갯불 천둥 불러오듯
질곡으로 고통당하는 이에게 상처를 남겼다
거기서 나는 아픔을 맛보았으니
묘지를 탐지하며 죽은 자의 침묵을
바라보다 마침내 굴복하였다
눈물 없이 그 옆에 서서


15 너는 내 속살로 피어나는

나는 당신을 꽃으로 비유하고 싶다
강가에 피어난 보라빛 제비꽃이고
청태 푸른 돌 틈의 풀잎에 얹힌 이슬이다
하여 당신 심장 속에서 소근거리는 정령들 말소린
순금 빛살로 오는 반짝임이고
남루한 가슴을 열고 당신을 맞이한다면
내 심장에 깃 든 꽃들에 의미를 주고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 한들
당신이 깃들기엔 꽃으로 피어나기엔 가슴의 남루는
바다에 묻히는 모래이고 어두운 빛살로 해저에 沈下한
오억 년 전 디사이비나 화석인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남루로만 남는 나날이나
고운 무늬로 남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이고
당신은 꽃이자 꽃들의 정령이다


16 새벽꿈에

새벽에 꾸고 난 그대 꿈에
잠은 달아나 우두커니 앉아있어라
가을날 늦은 비 지붕에 구슬피 내리고
놀란 가슴 아직도 뛰고 있어라
그대나 나 참아 놔 뉠 수 없는 부부라고
부부라고 심중에 맺은 굳은 언약
굳은 언약 백양의 성긴 가지에 걸어두었으나
고운 산새 하나 날아와 울지 않고
산허리 갈꽃 피어난 길에 꽃상여 하나
붉은 울음 울며가고 울음소리 헤집고 오는 모습,
외진 길 헤치며 그대 머리카락 다 풀려나고
들판 논두렁 가에 혼자 있어라
어느 때나 혼자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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