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렘은 이를테면 뉴욕 시와 그리고 도심지에서 돈을 벌며 사는 부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고발이다. 할렘의 유곽과 윤락녀들과 마약중독자들과 기타 모든 것들은 파크 애비뉴의 의젓하고 세련된 가식 속에서 무수히 행해지는 이혼과 음행의 거울이요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이다. 토마스 머튼<br><br>* 가로등 밑과 상점들의 간판이 뿜어내는 색색가지 명랑한 불빛만 환한 어두운 저녁, 비는 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를 테니까. 9쪽<br><br>*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사악한 것은 한 가지 뿐이지. 그건 당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 챨스 프레드 앨퍼드《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br><br>* 사람을 괴물처럼 대하면 그 사람은 괴물이 된다. 범죄 심리학<br><br>* 왕이시여! 이 때문에 울지 마소서. 저들이나 또 다른 이들 가운데 그토록 짧은 삶에서 삶보다 죽음을 한 번 이상 원치 않은 이가 없나이다. 헤로도투스《역사》<br><br>* 남이라는 사람들을 속이기는 얼마나 쉬운가! 63쪽<br><br>* 그런 파격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런 상투적인 장면은 지루했고, 또 실은 우리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약간 괴롭게 만든다. 89쪽<br><br>*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게 말해보아라. 네가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 내가 말해주리라. 니체<br><br>* 조용히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 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희망은 그릇된 것에 대한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사랑도 그릇된 사랑에 대한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어트《네 개의 사중주》<br><br>*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 박삼중 스님<br><br>*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을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해.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158,9쪽<br><br>* 주위의 모든 사람이 진흙 같은 빵 한 조각 때문에 투쟁할 때 고상한 즐거움을 누리는 게 옳다고 할 수 있을까? 크로포트킨<br><br>* 배반에 익숙하다고 배반이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듯이. 195쪽<br><br>* 그리고 그 죽음의 열차라는 것을 타고 싶다고 생각하고 나면, 세상이 가치들이 모두 헤쳐 모여, 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해지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해졌다. 죽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왜곡된 것도 많았지만 제대로 보이는 것 또한 많았다. 죽음은 이 세상의 가치 중에서 초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모든 소유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돈, 돈, 돈 하면서 돌아버린 이 세상에서 그것을 비웃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고,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01쪽<br><br>* 사형제도는 그 벌을 당하는 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제도이다.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 동안 육체적으로 생명이 다하지 않은 제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 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알베르트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br><br>* 그런데 그즈음 나는 어떤 사람도 행복의 나라나 불행의 나라 국경선 안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모두들 얼마간 행복하고 모두들 얼마간 불행했다. 아니, 이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면 얼마간 불행한 사람과 전적으로 불행한 사람 이렇게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종족들은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구별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뮈 식으로 말하자면 행복한 사람들이란 없고 다만, 행복에 관하여 마음이 더, 혹은 덜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뿐인 것이다. 218쪽<br><br>* 깨달음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삶은 연민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연민은 이해 없이 존재하지 않고, 이해는 관심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관심이다.(…) 그러므로 모른다, 라는 말은 어쩌면 면죄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의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연민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이해의 반대말이기도 하며 인간들이 서로 가져야 할 모든 진정한 연대의식의 반대말이기도 한 것이다. 248쪽<br><br>* 인간은 극에 이르면 결국 같은 것을 느낀다. 그것은 무감각이다. 284쪽<br><br>*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구약》,<에스겔서><br><br>*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인간의 영혼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 또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도 한때, 그것도 모르고 살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미 죽음이었는지도 모르고. 294쪽<br><br>*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기형도<br><br> -공지영,《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푸른 숲2005.<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