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며느리의 담담한 소리
어린 시절 내 살던 집은 일제시대 철도관사로 사용하던 집으로 피난 내려와 고향 찾지 못하고 토박인 양 눌러 살던 사람들이 불법건축물을 다닥다닥 붙여 미로와 같이 지어 살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시제 노가다 일이라는 흙벽돌 찍기와 미장, 구들장 놓는 일 등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워 흉내 내곤 했다.
그렇게 하여 방을 하나 달아내면 형님과 누님의 등록금이 나왔다.
아침나절과 저녁나절 부엌 앞 수돗가에는 시골장터와 같이 늘 시끌벅적 가난의 고단함도 잊은 채 웃고 떠들고 .....
어느 날 북쪽에 누운 내방 추녀 끝에 방 하나를 달아내 세를 주었다.
하나의 방을 미닫이, 봉창 문을 달아 둘로 나누어 부엌으로 통하는 방은 시어머니와 쫌 모자라는 작은아들이, 옆방은 큰아들 내외가 두 살 배기 아들을 데리고 기거 했다.
삼대가 내방 추녀 밑에 살고부터는 하루도 조용 할 날이 없었다.
지금껏 그만큼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는 꼴을 본적이 없을 정도다.
지금 생각하니 젊은 나이에 혼자된 시어머니의 사랑의 질투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 며느리는 모진 말과 학대를 감내하며 묵묵히 시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지극 정성이었다.
그리고 수돗가에서는 언제나 말없는 다소곳하고 얌전한 새댁으로 주위 여러 집 아낙네와는 다른 고귀함마저 들 정도였다.
어느 날 그 며느리가 병원에 다녀왔단다.
그 당시 병원에 다녀왔다면 심각하다는 뜻이 아닌가.
주변의 아낙들이 근심하면서도 선뜻 말을 붙이지 못하고 온갖 의문과 가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드디어 그 며느리가 수돗가에 나타난 것이다.
용기를 잡은 한 아낙이 비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가 아파서 병원 엘....”
순간 수돗가에 있었던 나를 포함한 아낙들이 숨을 죽이고 그 며느리의 입만 응시 하다, 쭈삐 쭈삐 피해 떠난 자리엔 그 며느리의 담담한 목소리가 맴돈다.
“보지 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