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40집 원고 / 이규석 >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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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기다리며

 

  어젯밤 시린 외풍에도

  물관을 타고 오르던 봄 소리 들리더니

  안개 자욱한 새벽이 열렸다

 

  얼마나 귀한 손님 맞으려고

  솔잎마다 맺힌 이슬방울

  매화 꽃봉오리에도 방울방울 매달았을까

 

  겨울을 얼마큼 잘라야 하나

  전지가위 들고 서성이는데

  목을 축이던 뱁새 한 마리 날아올랐다

 

  새가 흔들고 간 길이만큼

  가지를 자르자 겨우내 향을 머금고 있던

  매화는 붉은 피를 흘렸다

 

  모진 바람과 맞서온

  홍매도 백매도 이젠 모두 돌아오도록

  양지쪽으로 난 문 열어 두었다

 

 

 

순례길(1)

 

  산을 찾아 산으로 갔다가 숲에 빠졌어요

  바람결에 끊겼다가 이어지는 범종 소리 따라 걷지만

  산사는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산이 좋아 산으로 갔다가 길을 잃었어요

  눈물처럼 흐르는 진눈깨비 속을 헤매다가 빠져나오니

  산은 거기 그대로 있었어요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나타난 그대 얼굴

  울긋불긋 웃고 있네요

  덩달아, 나도 그냥 따라 웃었어요

 

순례길(2)

  삼백 년 전

  홀로 칠극의 길을 걸으신 분 만나러

  골 깊은 봉화로 찾아들었다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던 바람

  계곡 따라 흐르던 물

  나뭇잎 사이를 비집던 햇살

  모두 일어나 팔을 흔들었다

 

  옷깃을 여미고

  치켜뜬 눈 아래로 접자 발걸음 휘청거렸다

  식탐 색탐 다 내려놓으면

  나 곧게 걸을 수 있을까

 

  쉬 꺼지지 않는 욕망의 불씨들

  일곱 기도처를 다 돌고서야

  길 없는 길을 홀로 걸으신 그분의 그림자 밟으며

  산길을 따라 걸었다

 

 

순례길(3)

  올레길 나서자

  몽땅한 그림자도 따라나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절초 핀 들판을 지나자

  사운 대던 억새들

  하얗게 일어섰지만

 

  숨 가쁘게 가파르고

  험한 만큼 험했던 외길

  빨리 가려다가

  마파람에 주저앉았다

 

  홀로였다가

  다시 어우러지느라

  길어진 그림자

  붉은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꿈 마중

 

  지하철 첫 차를 탄 사람들

  백팩에다 하루치 삶을 쟁여 넣고서

  새벽부터 땅 속으로 들었다

 

  손잡이에 매달려

  꾸벅꾸벅 졸면서도

  놓칠 수 없는 꿈

  눈꺼풀마다 꽃으로 피어났지만

  혹여 꽃잎이 떨어질세라

  실눈을 떴다가 감곤 한다

 

  종점까지 홀로 선 사람들,

  첫 차의 꿈들이 깨어나 땅 위로 오르자

  초록빛 나무들이 다투어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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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0' DATE : 2023-08-12 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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