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40집원고 (정해영) > 토론해봅시다

본문 바로가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목    록  

 

정해영

 

사랑은

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것

 

꽃핀 나무 그림자 속에는

그 꽃의

색깔과 모양과 향기가 들어 있지

사랑 하는 마음은

나무 그림자의 꽃에 대한 기억

같은 것

 

사랑을 섣불리 말로 그리려 하면

깎아 놓은 사과처럼 변색하지

 

말없이 등을 내밀어

너를 업는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너의 심장이 닿는다 

사랑인 줄도 모르는 채

너를 들쳐 업은 일

 

사랑은 몰라도 줄 수 있는 것

원래

너의 앞이었던 나의 뒤

 

그 벌판 같던 등

하나면 충분하지

 

 

 

 

 

마음이 닿았던 자리

 

정해영

 

우연히 펼친 책 속

 

그녀의 언어가 내 마음을

대신 해 주는 것 같아

밑줄을 그었다

 

마음이 닿았던 자리

저울이 빈 원을 그리다

가리키는 눈금 같은

그곳

 

햇빛과 바람과 초록의 눈부신 생기

피어나는 쪽이 아니라

꽃이 진 다음

잎이 다 떨어진 뒤에도

바람은 왜 부는가의 문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폭풍우 속에서

오직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라고

사계절 바람을 보내는

그분께

매일 매일 흔들리는

그림자로

꼬박꼬박 답장을 쓴다는

그녀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없다가 생긴

흰 구름덩이에 밑줄을

그었다 

 

 

 

 

 

 

기차가 밀어내는

 

정해영

 

기차를 타고

미 대사관에 비자 받으러 가는 길

 

차창 밖

천천히 물들어 가는 나무는

지난여름

무성한 푸른 잎 점령군처럼

너울거렸을 때

마른 낙엽의 날

예감 했을까

 

가벼워 질 것은 가벼워지고

꺾일 것은 꺾이고 있는 나무

배어 나오는 빛

붉으레하다

 

높은 가지의 나뭇잎도

낮은 가지의 나뭇잎도

떨어지면 같은 바닥

 

사흘 뒤

미국으로 출국해야 할

내 급한 사정이 슬그머니

속도를 늦춘다

 

기차가 밀어내면

또 다가오는 느긋한 풍경

 

고함지르는 햇볕에게도

발목 잡히지 않는다 

 

 

 

 

마음의 역

 

정해영

 

내 마음의 역사에는

작은 매표소 하나 있다

 

사람을 만날 때

마음 한 조각 떼어

내미는 말 한마디가

차표 한 장

 

수레국화 바퀴 달린 말

우산버섯의 말

꽃같이 붉고

뿌리처럼 단단한 말

한 장씩 들고 오르는 기차

먼 길 가깝게 한다

 

종착역은 다르지만

닿고 싶은 사람에게 내리는

마음의 역

속을 보이며 겉을 보이며

함께 가는 길

 

그 사람의 가을비가

바닥 적시는

호젓한 산길 같고

깊은 골짜기 같은,

 

비가와도 눈이 와도

문을 닫지 않는 매표소

 

따뜻한 말 

주고받는 중이다 

 

 

 

 

수국의 무게

 

정해영

 

새벽 아파트 정원에

목수국을

꺽으러 간다

 

빈 병 같은 마음

수국의 웃음으로

채우고 싶어

떨리는 손이

몇 가지 꽃을 꺽어

돌아 서려는데

 

새 한 마리

이쪽을 쳐다보다 얼른

고개를 돌린다

 

종이가방에 담아가는

꽃송이 무게 보다

새에게 들킨 마음이 더

묵직하다

 

꼭꼭 숨긴 속을

누가 다녀가는 것 같다

 

연한 속대 같은

새의 눈길이

사람보다 더 가슴을

찌른다 

 

 

  


TAG •
  • ,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목록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70
증명사진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13
43
69
한 입 크기의 봄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23
55
68
봄을 기다리며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26
65
67
아침은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12
65
66
돌밥
2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27
95
65
아물지 않는 이별이 있듯이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23
101
64
나무도장 2
2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09
85
63
내가 나를 친구하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6
105
62
울다가 웃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2
69
61
말을 보낸다
2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28
116
60
오늘 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14
132
59
얼굴이 수척하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24
96
58
어부바 하며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26
88
57
항아리 집 / 952회 토론작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11
75
56
나무가 있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22
117
»
물빛40집원고 (정해영)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10
118
54
뉘엿거리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08
91
53
흰 바탕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25
107
52
우비를 고르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11
100
51
마음의 역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6-27
139
50
주름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6-13
119
49
살아도 살지 못했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23
96
48
저 만큼의 거리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25
260
47
다 와 간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11
238
46
점으로부터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28
201
45
없는 꽃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13
157
44
마음의 저울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28
155
43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14
155
42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31
167
41
나무의 속도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10
161
40
꽃 속에 들어가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7
227
39
묵직한 그림자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3
228
38
말이 시시하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25
342
37
안부 (930회 토론작)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11
265
36
물빛 39집 원고(정해영)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09
125
35
부끄럽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27
199
34
강을 빌리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13
130
33
수국의 웃음
2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23
209
32
그리운 저쪽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09
144
31
먼 오늘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26
142
30
꽃 뒤에 숨는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11
180
29
문화적 식성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23
175
28
흰 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26
159
27
빗소리가 보인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12
141
26
엽서가 왔다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22
180
25
그 흔한 말로
1
하이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08
188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Copyright © mulbit.com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