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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20 15:39

엘리스의 나라(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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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스의 나라<br><br><br><br><br>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결론이 나자 여자는 슬펐다. 그것은 오래된 예감이 정작 이루어질 때 느끼는, 조금쯤은 준비된 슬픔과도 같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흐르고, 짐작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여자는 자신이 생각보다 허둥거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궂은 날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토록 젖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br><br>  일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에게 가난은 먼 이국의 전쟁과도 같은 풍문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꽤나 점차적이었으므로 여자는 남편과 자신이 가난해졌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여자에게 다가온 가난은 시가지를 포위한 적군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어찌어찌 수도를 끊고, 그 몇 주 후엔 전기와 통신을 차례로 끊어나가는 형상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계약이 취소되고, 그래서 자신의 일이 점차 내리막을 타게 되었을 때 남편이 어리둥절했던 것처럼, 여자 역시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껴 쓰다 못해 손바닥에 대고 두들겨대도 결국 바닥을 드러낸 화장품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 깨끗해진 뒤였다.<br>  사람들이 건강에 보다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부터였다. 그래서 생긴 유행어였다. 한때, 찻잔을 앞에 놓고서 사람들은 서로를 장난스레 바라봤었다. “아직도 커피를 마시세요?” <br>  그 비슷한 질문을 여자는 노래방 입구에 앉아 계산대 위에 놓인 TV를 멀거니 시청할 때마다 반복해서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가 막힌 배경을 세트로 한 드라마를 봤거나 요란한 광고를 보고나면 정도가 조금 더 심했다. 그 물음은 여자의 몸을 돌려세운 뒤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던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가난이 문젠가요?’ <br>  사랑이야말로 세상의 처음과 끝인 것 같은 드라마를 구경하다가, 까르르 까르르 방청객들이 대책 없이 엎어지는 오락프로에 넋을 놓다가 여자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해보기도 했다. 아직도? 아무렴, 물론이었다. 삶이란 커피나 녹차처럼 입맛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호식품이 아니다. 처지 또한 그렇다. 그러니 누군가들에게는, 가난이야말로 이 현란한 유행의 시대에도 유독 변신하거나 사라질 줄 모르는 둔감하고 질긴 존재인 게 분명했다. “가난은 불편할 뿐이다”라고 말해지는 순간, 말로써 가난은 극복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관념의 피해자들은 누굴까? 절박한 이들에게 관념은 아무런 힘이 없다.<br>  다큐멘터리나 교양프로를 시청할 적이면 여자는 비교적 그런 의문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대신 여자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루게릭 병에 걸린 남편을 돌보는 한 여인의 헌신적인 사연이 방송되는 동안에는 아예 대놓고 울었다. 카메라가 그들의 결혼식 사진을 한참동안 비추었었다. 신부는 신부다웠고 새신랑은 새신랑다웠다. 남자는 스마트한 멋이 있었다. 약간 흥분한 것처럼 보였지만, 신부를 안아 올릴 때 찍힌 표정은 사뭇 당당하기만 했다. 지금은 입술조차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사진 속의 남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여자는 코를 자주 풀어야했다. 어쨌거나 둘은 함께 있지 않은가. 반 넘게 남아있던 두루마리 휴지가 금방 동이 났었다.  <br>  그러나 방송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평소 그리 길지는 않았다. 손님이 들면 노랫소리에 묻혀 TV는 이내 시늉만하는 벙어리였다. 그래도 여자는 짬짬이 습관처럼 TV 앞에 앉곤 했다. 그곳에서 일하고부터 별 수 없이 맛들인 취미였다. 다행히, 울고 있는 여자를 발견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br>  “이를 닦아도 고약한 냄새가 나.” 이즈음, 세면대 거울 앞에서 남편은 양치질을 끝낸 입 안을 들여다보면서 자꾸만 이맛살을 찌푸렸다.(계속)<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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