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사람들은 처음부터 나를 모른 채했다
산을 탈 때나 절벽 앞에 무릎을 꿇을 때도
새 구두가 숨통을 조여와 비칠거려도
사람들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마른 논처럼 뒤꿈치가 쩍쩍 갈라지고 엄지가 휘어져도
욕망을 향해 나를 재촉할 뿐
부드러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음소리대신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야 했다
사람들은 얼굴만 사랑했다
눈만 뜨면 거울을 들여다보고 색칠하고 콧대를 세웠다
얼굴이 꽃인 줄은 알지만 내가 뿌리라는 건 몰랐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면 꽃도 따라 아플 것이고
내 상처가 꽃을 시들게 하리라는 건 끝까지 모른 척했다
어루만지고 위로해 달라
침묵하지만 번뇌인 내게, 그대 사랑스런 손길을 달라
광부와 벚꽃
길은 절벽 앞에서 끝났다
그는 나무뿌리처럼 몸을 구겨 땅속으로 들어갔다
검디검은 나날 속에 벽을 부수는 곡괭이 소리와 램프 불만이
숨결처럼 깜빡였다
막장 밖으로 나올 때면
구름 위를 걷듯 뭉클 뇌수가 쏟아져 마구 피어오르는
천만 개의 헛웃음들
밥도 피도 검은 물이 들었다
허파에 석탄 알갱이들이 쌓이면서
탄 자루가 된 듯 가만히 서 있어도 비질비질
탄가루가 흘러내릴 것 같은 옆구리
몸속에 묻힌 눈이 부수수 하늘을 본다
사십 년 탄광에서 일해 온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봄
울대에 감긴 석탄가루 뱉아 내느라 연신,
기침을 해대는 그의 몸이 박산 튀기는 기계가 되어
연분홍 꽃잎을 하늘로 쏘아대고 있다
팡팡, 튀밥처럼 터지는 꽃숭어리들.
그가 등을 보일 때
며칠이 절뚝절뚝 지나갔다
빗줄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그가 돌아왔다
그의 입 안에 거짓말이 자라고 있었다
그가 뱉은 말은 돌층계 위에 내던져졌다
층계가 흔들리고 몸이 주저앉았다
진창 같은 분노가 뱃속에서 뜨겁게 뒤섞였다
어둠이 조각조각 찾아왔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주먹 같았다
시커먼 덩어리로 찍고 두들기고 아픈 곳을 밟아
신음을 토하게 했다
텅 빈 방에 (이별!) 그 한 단어가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손톱이 척추를 가로질러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 질펀했다
여름, 바다
아! 나는 추락하고 있는 것일까
뜨거운 네 눈빛 속으로
파도가 소리치고 있어
세포가 분열을 일으켜
산산이 빛으로 기화하고 있어
내 야성의 문을 부수고 잔혹한 느낌표를 던지는
그 남자!
가을 전별
천천히 체온을 낮추는 사내
내 곁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
돌확을 적시는 비속에는 환청처럼
아직도 푸른 목소리 가득한데
절름거리며 산 길 오르는 저 사내
등짝에 고여 있을 련민 한 타래
가슴 패인
바람의 행로따라 등을 켜드는
달
구름의 문
물안개가 자동차의 온몸을 적신다
자동차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길의 신음소리를 감각한다
예정보다 빨리 눈 떠버린 동면기의 동물처럼
微明 속의 해가 조금씩 목젖을 열자
안개는 하얀 실타래 감아 들고
선승 같은 소나무 긴 다리로 절을 올린다
저 쪽에 앉아계신 그대는 누구신가
솟구치는 경애가 숲을 설레게 하고
날아오르던 산들 단정히 머리 조아린다
핏물 들고 싶다
네 심장을 물어뜯고 싶다
산 것의 생고기로 씹히는 격렬한 고통을 맛볼지라도
먹어도 허천나는 사랑의 허기
구름이라도 밟으며 네게로 가고 싶다
유리처럼 깨어질 것만 같아 스스로 자해했던 나의 노을들
차가운 시간의 선상에서 눈물은 흔들리고
이별을 기억하지 않으려
내 눈은 미루나무 우듬지에 찔리고 있다
마왕의 날개 같은 밤의 주왕에
명주치마를 폭포처럼 풀어놓고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절벽을 깨물어
사랑, 너에게 핏물 들고 싶다
군산, 테라코타
-권진규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습기 찬 도시 귀퉁이에 주저앉았을 때
분칠한 세상이 흔들어보이던 황금 잎사귀,
속으로 뿔난 도깨비들이 뻘겋게 웃으면서 그녀
머리끄댕이 질질 끌어 대낮의 창살 속에 밀어 넣었다
싯누런 해가 두꺼운 유리창에 벌레처럼 붙었다가 삭아갔다
어둠이 흐린 등을 켜들면 짙은 화장을 하고 곰삭은 달을 먹고
벌떼처럼 날아와 심장에 대침을 꽂는 사내들을 맞았다
백설기 같은 순결이나 눈물은 잊어버렸다
갑자기 형광등이 꺼지고 방안에 검은 연기가 자욱하다
뱀 같은 불길이 날름거리며 창틀을 넘어온다
쇠창살을 흔들어보지만,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아! 그 남자 혀같이 뜨거운 것이 온몸을 휘감아온다
사지가 찢어진 주인남자가 저기 전봇대에 걸려있네
지나가는 해가 살 한 점 쓰윽 베어 먹네
날카로운 손톱이 뽀루지 같은 눈을 파 먹네
아! 누가 이름을 불러다오 두 눈 번쩍 뜨고 생살로 타는 生을
등신불이라 불러다오
저 벽 위에 삐딱하게 흘러내린 얼굴들, 걸려있네
빛이 어둠을 어떻게 통과하는가
-극장에서
문틈으로
레이즈처럼 강렬하게
햇살이 몸을 뚫고 들어왔다
나도 그녀의 어둠 깊숙이 심장을
손 담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