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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사랑은

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것

 

꽃핀 나무 그림자 속에는

그 꽃의

색깔과 모양과 향기가 들어 있지

사랑 하는 마음은

나무 그림자의 꽃에 대한 기억

같은 것

 

사랑을 섣불리 말로 그리려 하면

깎아 놓은 사과처럼 변색하지

 

말없이 등을 내밀어

너를 업는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너의 심장이 닿는다 

사랑인 줄도 모르는 채

너를 들쳐 업은 일

 

사랑은 몰라도 줄 수 있는 것

원래

너의 앞이었던 나의 뒤

 

그 벌판 같던 등

하나면 충분하지

 

 

 

 

 

마음이 닿았던 자리

 

정해영

 

우연히 펼친 책 속

 

그녀의 언어가 내 마음을

대신 해 주는 것 같아

밑줄을 그었다

 

마음이 닿았던 자리

저울이 빈 원을 그리다

가리키는 눈금 같은

그곳

 

햇빛과 바람과 초록의 눈부신 생기

피어나는 쪽이 아니라

꽃이 진 다음

잎이 다 떨어진 뒤에도

바람은 왜 부는가의 문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폭풍우 속에서

오직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라고

사계절 바람을 보내는

그분께

매일 매일 흔들리는

그림자로

꼬박꼬박 답장을 쓴다는

그녀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없다가 생긴

흰 구름덩이에 밑줄을

그었다 

 

 

 

 

 

 

기차가 밀어내는

 

정해영

 

기차를 타고

미 대사관에 비자 받으러 가는 길

 

차창 밖

천천히 물들어 가는 나무는

지난여름

무성한 푸른 잎 점령군처럼

너울거렸을 때

마른 낙엽의 날

예감 했을까

 

가벼워 질 것은 가벼워지고

꺾일 것은 꺾이고 있는 나무

배어 나오는 빛

붉으레하다

 

높은 가지의 나뭇잎도

낮은 가지의 나뭇잎도

떨어지면 같은 바닥

 

사흘 뒤

미국으로 출국해야 할

내 급한 사정이 슬그머니

속도를 늦춘다

 

기차가 밀어내면

또 다가오는 느긋한 풍경

 

고함지르는 햇볕에게도

발목 잡히지 않는다 

 

 

 

 

마음의 역

 

정해영

 

내 마음의 역사에는

작은 매표소 하나 있다

 

사람을 만날 때

마음 한 조각 떼어

내미는 말 한마디가

차표 한 장

 

수레국화 바퀴 달린 말

우산버섯의 말

꽃같이 붉고

뿌리처럼 단단한 말

한 장씩 들고 오르는 기차

먼 길 가깝게 한다

 

종착역은 다르지만

닿고 싶은 사람에게 내리는

마음의 역

속을 보이며 겉을 보이며

함께 가는 길

 

그 사람의 가을비가

바닥 적시는

호젓한 산길 같고

깊은 골짜기 같은,

 

비가와도 눈이 와도

문을 닫지 않는 매표소

 

따뜻한 말 

주고받는 중이다 

 

 

 

 

수국의 무게

 

정해영

 

새벽 아파트 정원에

목수국을

꺽으러 간다

 

빈 병 같은 마음

수국의 웃음으로

채우고 싶어

떨리는 손이

몇 가지 꽃을 꺽어

돌아 서려는데

 

새 한 마리

이쪽을 쳐다보다 얼른

고개를 돌린다

 

종이가방에 담아가는

꽃송이 무게 보다

새에게 들킨 마음이 더

묵직하다

 

꼭꼭 숨긴 속을

누가 다녀가는 것 같다

 

연한 속대 같은

새의 눈길이

사람보다 더 가슴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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