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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0-02 15:30

샛길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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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에 서서



창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계절은 여름으로 넘어가려 하지만 방바닥은 여전히 습기로 굽굽하다. 간밤에 따뜻한 온기를 찾아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지 어깻죽지가 다 뻑적지근하다. 이부자리를 걷어내자 방바닥은 이내 찬밥처럼 식어버린다. 일어나 창문을 여니 햇빛이 방안으로 비껴들어온다. 햇빛이 몸에 닿자 딱히 어디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몸 속 어딘가가 스멀스멀 가려워온다. 방 한쪽 구석에는 가방이 찌그러져 있다. 좀처럼 한기가 가시지 않는 몸도 주체하기 어려웠지만, 무언으로 항변하는 남편과 마주하기가 힘겨워 회사에 며칠 병가를 내곤 친정으로 떠나왔다. 결론 없는 지루한 신경전을 벌리는 것보다 떨어져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속이 허전하고 귀안에서는 윙 소리가 나는 게 영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전화도 없이……어째 만날 굶고 다녔냐? 어머니는 나의 초췌한 얼굴에 잠시 놀라는 듯 했으나, 잠시 짬을 냈다는 나의 말에 이내 일상의 평상심을 되찾아 일에 열중했다. 대충 겉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은 나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침묵에 싸인 집은 그 무게에 아래로 푹 꺼져있는 듯하다. 집안 공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대문을 나선다.
거리로 나가자 금세 눈동자에 물기가 핑 돌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동자에 꽂혀오는 햇빛을 연신 떨어뜨린다. 그런 후에야 겨우 길바닥이 보인다. 긴장이 풀린 팔다리는 제각기 휘청거린다. 사지가 따로 갈 곳을 정해놓은 듯 갈피를 못 잡는다. 햇빛의 훈기로 인해 겨우 팔다리가 제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손과 발은 지나치게 냉랭했다. 나는 한참 손바닥을 비벼댄다. 손바닥에 경미한 온기가 겨우 전해온다. 몸 안 어딘가에 고여 있던 감정들이 비로소 통로를 되찾은 듯 전율이 더해왔다.
햇빛은 보도블록 위에 은가루처럼 반짝이며 뿌려지고 있었다. 누런 메주 빛깔의 얼굴들이 무표정하게 스쳐 지나간다. 길 가장자리 공중전화 부스안에서는 한 사내가 계속 전화기에 매달려 있다. 전화 부스안의 그 안경 낀 사내는 어항의 물고기처럼 입을 벙긋벙긋해 가며 한 쪽 팔이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나는 신기한 물고기를 바라보듯 오므라지고 벌어지는 그의 입을 유심히 쳐다본다. 사내의 입가는 거품을 품고 있는 듯 허옇다.
순간, 길 건너편 신호등에 파란 불이 켜졌다. 파란색을 보면 길을 건너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습관에 따라 발이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던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질주해 오는 차량들과 거리를 재며 발은 빨라진다. 역시 발은 머리 쪽보다 행동파이다. 머리가 복잡하게 하나의 상을 찾아내기도 전에 어디론가 향하여가는 쪽은 언제나 발이다. 지금 발이 가고 있는 곳은 성모당 방향이다. 결혼 전, 늘 불안한 일상에 휩싸일 때면 진저리치는 몸을 이끌고 발이 찾아가던 곳. 그 곳에 가면 어느새 거센 불꽃은 사위어져버리고, 모든 욕망이 재로 변한 듯 한층 가벼워진 육체와 함께 발은 순한 짐승의 걸음걸이로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성모당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러하듯 단정하였다. 햇빛과 그늘이 서로 밀고 당기는 정적만이 가득 찬 곳이었다. 정적 너머로 붉은 넝쿨장미가 한 두 송이 올라와 있다. 성모당 앞에 이르자, 넘쳐흐르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나도 모르게 잠시 몸이 멈칫한다. 정문에 들어설 때면 망설이게 되는, 설명할 수 없는 당혹감이 일시에 밀려온다. 그러나 발은 주저함 없이 곧바로 안으로 들어선다.
성모당 안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초록의 나뭇잎 위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빛을 보니, 이곳은 마치 햇빛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햇빛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풀 한 포기에도, 구석진 곳의 돌 위에도, 어느 곳에든 골고루 뿌려져 있는 햇빛은 평등의 화신처럼 보이게 한다. 눈이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해 겨울이었던가.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 겨울은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그때 와본 이곳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바깥세상보다 더 높이 쌓인 듯한,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어느 후미진 곳에든 소복이 눈 덮인 풍경을 보고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잔디 광장으로 올라갔다. 초록의 잔디 위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가볍게 날아다닌다. 성모 마리아상을 마주 바라보며 나는 의자 위에 걸터앉는다. 이곳에서의 모든 풍경은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듯하다. 잔디 위에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처럼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간절함이 저절로 배여 나온다. 나는 온몸에 햇빛이 감겨오는 것을 느낀다. 처음에는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던 햇빛이 어느새 미세한 통증마저 일으키는 듯하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햇빛이 더욱 강렬해진다. 그대로 앉아 있으면 햇빛 속으로 나의 몸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형상이 내 눈에서 희미하게 멀어져 간다. 의자에서 일어나 성모당 안 더 깊은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십자가 아래 망자들의 무덤이 있었다. 담 너머로 높은 도심의 건물이 몇몇 보인다.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에 이렇게 깊은 고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돌아 나오는 길목에는 돌 위 가냘픈 금속동상이 있었다. 아래에는 이슬 머금은 국화 몇 송이가 놓여 있다. 방금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건지 국화는 생생하다. 동상의 손에서는 햇빛이 튕겨 나오고 있다. 돌 위에 새겨진 글자가 눈물 글썽이듯 물기에 지워져 있다. 나는 문득 그 동상의 손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디 굵은 금속덩어리의 손은 지나치게 차가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머리가 맑아온다. 순간, 나의 목이 심하게 뻣뻣해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머리 숙여 죄를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그만큼 나의 상체는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뒤로 젖혀져 있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간다.

고양이가 나의 발치에 드러누워 장난을 걸어왔다. 내가 고양이 목을 간질이자 고양이는 골골골 소리를 내며 내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비벼댔다.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린다. 고양이가 몸에 털을 바짝 곤두세운다. 고양이 뱃살이 무척 따뜻하다. 멀리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기차가 어둠을 쏟아놓은 듯, 집안은 갑자기 어둡고 서늘하다. 몸에 소름이 돋아 오른다. 아버지는 전날 먹은 술독을 빼느라 방안에서 꼼짝없이 누워 있더니, 오후 늦게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나갔다. 술로 찌든 속을 다시 술로 풀러 나간 것이다. 아버지가 누워 있던 방바닥은 담배 연기에 찌들어 누렇고, 담뱃불로 검게 탄 구멍이 군데군데 나 있다.
아무래도 내가 보기엔 아버지의 주특기는 사람들을 아니, 어머니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일인 것 같다. 그럴 때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울음을 터뜨리거나, 이쪽 벼랑 위에서 가슴 졸이며 구경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을 아니, 어머니를 벼랑으로 몰아갈 때 아버지가 주로 이용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술이 술술 들어가면 유창한 말이 나오는 커다란 입과 뿌두둑 잘 꺾어지는 뼈마디 굵은 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한눈을 파는 사이 필사적인 힘으로 벼랑에서 빠져나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벼랑으로 몰아가는 방법은 늘 똑 같은 방법이었지만, 어머니가 벼랑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은 내가 보기엔 날로 대담해지고 다양해졌다.
확실한 것은 오늘도 내일도 그러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이다. 대개가 그렇지만, 아버지가 집안에 차가운 바람을 남기고 쌩하니 자전거를 타고 나간 날이면, 어머니는 늘 그렇듯 이른 밥상을 차렸다. 밥 먹자. 어둠에 대한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어머니는 밥상을 내려보다가, 작심한 듯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상 위로 숟가락 내려놓는 소리가 나에게는 마치 기적 소리처럼 여운이 길고 차갑다. 나는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지만, 돌이 목구멍에 넘어가고 있기라도 한 듯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다. 입 안엔 밥이 그득하다.
방안에 텔레비전 소리가 나지막하게 켜져 있고, 내 눈길이 가 닿는 구석마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하다. 어머니와 나는 이부자리를 펴고 자리에 눕는다. 잠은 오지 않지만, 어린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누워서 눈은 텔레비전에, 귀는 바깥으로 쫑긋 세운다. 어머니는 옷을 입은 채 얼굴을 베개에 대자마자 잠이 든다. 잠든 어머니에게서 짠 내가 난다. 잡다한 반찬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야릇한 냄새. 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하는 어머니는 이런 초저녁이면 늘 몸이 파김치다. 텔레비전에서는 무슨 코미디 프로가 진행되고 있다. 사이사이로 억지로 집어넣은 웃음소리에 어머니의 팔다리가 퍼드덕거린다. 마치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잠이 든 한 마리의 어미 새처럼. 어머니가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자는 모습에 나의 몸은 어느새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져 있다.
쥐가 찍찍거리며 천장을 긁고 있었다. 쥐들이 몰려가는 방향이 나의 눈에 잡힐 즈음 밤은 깊을 대로 깊다. 아버지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 속 저울대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이름이다. 돌아오면 좋겠다……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아버지가 돌아오면 좋겠다……차라리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고양이가 방문 앞에서 어른대다가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다. 쥐를 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집은 구멍이 많은 슬레이트집이다. 그래서 바람이 많고 쥐 또한 많다. 밤마다 고양이와 쥐들은 천장을 마음껏 내달린다. 쥐들이 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을 청하곤 했다. 쥐들이 달려가는 곳, 그 끄트머리에서 나의 꿈은 찬란하게 시작되곤 했다. 나는 그 꿈속에서 가파른 벼랑과 벼랑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리고 비 오는 날이면, 쥐들과 함께 슬레이트 처마 위로 경쾌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밤새 노를 저어갔다. 아버지가 없는, 머나 먼 꿈의 왕국으로…….
꿈은 늘 그렇게 찬란하게 시작되곤 했지만, 아버지 없는 왕국으로 가는 나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꿈의 왕국에 도착하기까진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나의 축지법은 늘 미숙했고 저곳만 넘으면 혹시 그곳이 아닐까, 하는 결정적인 지점에 다다르면 아버지에 의해 발목이 잡히기 일쑤였다. 그곳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밤새 노를 저어가고 벼랑을 수십개를 넘고 넘어도 좀처럼 닿을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정신없이 벼랑을 넘어가다 보면, 어느새 아버지는 내 뒤에 바짝 따라왔다. 고양이가, 아니 아버지가 벼랑을 넘어오는 속력은 어찌나 빠르던지 밤마다 나는 젖 먹은 힘을 다해 이 벼랑 저 벼랑으로 달아나기 바빴다. 아버지의 굵다란 손이 내 옷자락에 닿을 즈음 나는 내 거친 신음 소리에 놀라 화들짝 눈을 뜨곤 했고 나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잠깐 선잠이 들었나. 어둠 속에서 철 대문이 누군가의 발길에 차이는 소리가 났다. 방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에서 깨어난 어머니는 후다닥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두 눈을 꼭 감았지만, 나의 가슴은 콩닥콩닥 벌써 콩을 볶는 듯하다. 속이 울렁거린다. 벽 쪽으로 바짝 돌아누웠지만, 나의 모든 감각은 벌써 바깥을 향하고 있다.
아버지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서늘한 어둠을 끌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어둠의 냄새란 원래 이런 시큼한 냄새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밤이 무섭다.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는 어둠이 무섭다. 시커먼 어둠과 함께 시큼한 냄새를 달고 들어오는 아버지가 무섭다. 나는 다른 아이들도 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무서워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무서울 때면 어린 나는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라는 주문을 반복해서 외우다 보면, 어느새 콩 볶던 나의 가슴은 아무렇지 않게 진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정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싶을 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이렇게 저렇게 하라’ 라는 속담이 하나 더 추가된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고양이가 열린 방문 사이로 재빨리 들어왔다. 고양이는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아버지 주위를 시나브로 맴돌았다. 이 눔의 새끼가. 아버지는 손으로 고양이를 밖으로 확 밀쳐내고는 방문을 닫아버린다.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잠든 척 돌아누워 있는 나에게 다가와 이불을 젖힌다. 아버지는 어둠의 냄새가 나는 입을 내 볼에 갖다 댄다. 까칠한 수염에 나의 볼은 경련이 일어나는 듯하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쉬지 않는다. 볼에 까칠한 수염이 박힌 듯 따갑다. 아버지는 비틀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가 주저앉는다. 눈을 감고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또다시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내 머릿속은 영화관 안처럼 불이 꺼져 있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다 잡은 먹이가 바로 앞에 있기라도 한 듯이. 아버지는 이마 위로 실핏줄을 날카롭게 세우고 이를 뿌드득 뿌드득 갈기 시작한다. 이럴 때면, 나는 한 마리의 배고픈 호랑이가 방안을 맴돌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방안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아버지의 몸 속 어딘가에는 분명 쇳덩이가 들어 있을 것이다. 안 그러면 아버지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날 리가 없다. 언젠가 철공소에서 본, 불꽃이 파팍 튀는, 그런 쇠 냄새와 열기가 방안에서 피어난다. 철공소에서 용접 작업을 하던 그 사람들처럼 얼굴 보호막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나의 얼굴을 가리고 싶은 심정이다.
고양이가 계속 문턱을 긁어대며 울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고양아, 어서 어디론가 사라지거라. 고양이가 마음속으로 외치는 내 소리를 알아들을 리가 없다. 어머니는 방문을 조금 열고 고양이를 손으로 밀쳐내며 눈짓을 한다. 어서 가. 돌아앉은 어머니 쪽으로 뭔가 휙 날아왔다. 어머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시큼한 액체가 방문 위로 쏟아져 내린다. 막걸리 냄새가 방안 가득 피어오른다. 고양이는 방안이 더 궁금해진 듯 연거푸 날카롭게 울부짖는다. 냅다 고함을 지르며 아버지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방문을 확 열어젖힌다. 이 눔의 고양이 새끼가. 아버지는 고양이의 목을 마디 굵은 손으로 움켜잡더니 바닥으로 힘껏 내리친다. 금속 같은 소리가 퍽 들려온다.
텔레비전 소리가 잠시 멎은 듯 사방이 조용했다. 소리 난 쪽으로 돌아다보니, 방바닥에 고양이가 축 퍼들어져 있었다. 순간, 나는 눈을 감는다. 고양이의 널브러진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가슴 밑에서부터 뭔지 모를 소리가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정작 입에선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훌쩍이던 나의 눈에서는 어쩐 일인지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방안 벽지의 꽃무늬들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면서 송이송이 방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커다란 꽃들이 소리 없이 고양이 주검 위로 떨어지고, 누운 내 몸 위로 떨어져내린다. 이년, 얼굴이 왜 그리 벌건 거야? 오늘 어디 갔다 왔지? 어느 놈이랑 눈 맞은 거야? 씨발,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거야, 뭐야? 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거야? 빨리 바른 말 못 해? 밤이 깊어질수록 어머니를 다그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센 불꽃을 피워 올렸다.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튕겨 오르는 불꽃의 뜨거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는지 방안 한 쪽 구석에 몰려있던 어머니는 후다닥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갔다. 아버지는 달아나는 어머니를 잡기 위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따라 나가더니 한참 만에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내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아버지는 버럭 입에서 쇳소리를 내며 짧게 불꽃을 품어낸다. 나가서 네 엄마 찾아 와, 얼른! 저 년도 저거 어미년 하고 꼭 닮아가지고!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며 잔뜩 찡그린 얼굴로 대문을 나선다. 어디로 갔는지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어두운 골목으로 어머니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발이 좀처럼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야심한 시간이라 골목에 불이 켜져 있는 집도 없었다. 차 소리가 나는 환한 대로로 걸어 나간다. 드문드문 자동차들이 속도를 내며 도로 위를 지나가고 있었고 고개 숙인 가로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길 건너편 동네에 불 켜진 창문 하나가 보인다. 저런 따뜻한 창문 하나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다. 불 켜 둔 창 아래에서 식구들과 오래 소곤거리고 싶었다. 나에게도 언젠가 저런 따뜻한 방을 가질 날이 오긴 할 것인지. 눈에 눈물이 핑 고인다.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막 택시에서 내려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나는 다시 집 앞으로 얼른 뛰어가 보았다. 대문 앞에는 어머니가 서성거리며 집안을 살피고 있었다. 엄마! 뒤돌아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아직도 터져 버릴 듯이 벌겋게 부풀어 있다. 그런 어머니 얼굴을 더 이상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나는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집안에서 아버지가 혼자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드문드문 대문 밖으로 들려나온다.
애꿎은 땅을 발로 차고 있던 나를 끌고서 어머니가 간 곳은 다름 아닌 집 근처에 있는 어느 대학교 병원 응급실이었다. 나의 손을 놓고서 그제야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어머니는 실의에 빠진 환자 보호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응급실 복도 의자에 앉아 있다. 응급실 상황에 이리저리 바쁘게 고개를 돌리던 어머니는 조금씩 긴장이 풀려서인지 곧잘 의자에 기대어 그대로 깜박 잠이 들기도 한다.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황급히 복도를 오고 간다. 아래로 꾸벅꾸벅 고개가 꼬부라지던 어머니는 뛰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구급차에서 다급하게 응급실로 옮겨지는 환자와 어쩔 줄 몰라 울부짖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을 불안스레 바라보는 어머니. 응급실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한참 만에 나온 어머니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집에 가자. 어머니는 여긴 왜 찾아오는 것일까? 집 나와서 하늘아래 갈 곳이라곤 고작 여기 밖에 없단 말인가? 이곳에 와서 어머니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 것인가? 아버지는 이제 잠이 든 것일까? 나는 긴 숨을 내쉬며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본다. 날씨가 흐린지 별이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진하게 소독약 냄새가 나는 듯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옷을 벗지도 않은 채 방안에 잠이 들어 있었다. 잔뜩 벌어진 입은 미처 못 다한 말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가끔씩 움찔거린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어머니의 얼굴은 더 이상 붉지 않다. 오히려 잠든 아버지의 얼굴이 진하게 붉은 빛이 감돈다. 잠든 아버지의 이마 위로 실핏줄이 줄지어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방안에 고양이 주검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미 다른 곳으로 치운 모양이었다. 대문 옆 쓰레기통에 고양이가 종잇조각처럼 반으로 접혀 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고양이가 정말 죽은 것이로구나, 라고 느낀다.
날이 점점 환하게 밝아왔다. 길가 대로에서 쓰레기차가 왔음을 알리는 노래가 들려온다. 어머니는 쓰레기통을 말끔히 비우고 돌아온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쓰레기통을 대문 옆에 갖다 놓는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어머니는 아침 일찍 시장으로 내다 팔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짓는다. 나는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한 어머니가 야채 다듬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과 대문 옆에 놓인 텅 빈 쓰레기통을 번갈아 쳐다본다. 갑자기 나는 배가 고파왔다. 혓바닥이 입안으로 자꾸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게걸스럽게 무엇이라도 잡아 뜯고 싶었다. 잇몸이 근지럽다. 나는 아래위로 이를 한번 세게 부딪쳐 본다. 어쩐지 이상하게도 동물의 냄새가 그립다. 눈앞에 어슬렁거리는 동물 한 마리라도 있었으면 단번에 달려들어 먹어 치울 듯이. 그러나 뭔가를 먹으려고 하면 아무 것도 먹히지 않을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기에, 텅 빈 배를 잡고 집을 나선다. 어린 내가 막상 갈 데라곤 별로 없지만.

오랜 대화 끝에 아이를 갖지 않기로 남편과 약속했었다. 부모들 간의 사이가 별로 원만치 않은, 그렇다고 이혼한 상태도 아닌, 한집에서 서로 딴방에 거처하며 겉으로만 부부 관계를 유지하던 어정쩡한 환경에서 자라온 남편은 아이를 낳지 말자는 나의 제의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결혼 후 7년을 지내고 나니, 생리주기가 일정치 않은 사람은 임신이 쉽지 않다는 주위의 말에 한결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만 덜컥 임신이 된 것이다. 불규칙적이던 생리가 조금 비치다 끝나더니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게 몸살기운이 계속 이어졌다. 회사동료가 당신 임신 아니냐는 소리에 깜짝 놀라 집에서 임신 테스트를 해보니 가당찮게 임신으로 나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싶어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의사는 벌써 임신 3개월째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임신 소식에 남편은 예상외로 상기되고 들뜬 모습을 나에게 드러내보였다. 남편에게 일말의 배신감마저 느끼던 나는 이건 정말 우리들에겐 예상치 못한 일이야, 아이를……아이를 지워 버려야겠어, 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정색을 하고 나를 향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내가 아이를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예상치 않던 아이가 우연히 들어선 건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해. 그렇게 급하게 단정 지을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우리 서로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자.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았지? 지금 당신이 했던 말 뱃속에서 아이가 다 듣고 있어! 그러면 다짜고짜 날이 선 목소리로 나는 남편을 향해 대뜸 고함을 지르곤 했다. 선물은 무슨 얼어죽을 선물? 당신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지구 한쪽 귀퉁이에서 꼼지락거리며 숨 쉬다 조용히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우리 서로 그렇게 이야기 되지 않았느냐, 아이가 원하는 시간에 제때 오지 않는 부모 그리고 설사 그 시간에 아이와 같이 있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부모는 나의 아버지 그리고 당신네 부모만으로 족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사랑이라는 미명하에……아이를 세상에 함부로 내던져 놓는 일은 제일 큰 죄악중의 하나일 뿐이다, 부모가 아이와 시간 맞추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라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 질긴 줄을 조용히 놓고 싶다, 고. 막상 내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에 남편은 상당히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내가 매일이다시피 막무가내 지랄 육갑을 떨어도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의 어깨를 잡거나 감쌀 뿐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유산이 된 것이다. 며칠 동안 계속 피가 조금씩 비치기에 차일피일 계속 미루다가 점점 그 증세가 심해져서 결국 병원엘 갔더니 유산의 기미가 보인다고 유산을 방지하는 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화장실 변기에 피가 덩어리째 흘러나왔다. 병원 의사는 직업상 걱정스런 얼굴로 아기가 자연유산이 되었으니 바로 소파수술에 들어가야 한다며 서둘렀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깬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은 나에게 가타부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점차 남편은 늦은 귀가와 함께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다. 집안엔 미묘한 냉기가 떠돌았고 아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한기가 들어앉았다.

아버지가 끈질기게 어머니를 벼랑으로 내몰던 숱한 나날들. 결론이 너무나도 뻔한, 주연도 조연도 좀처럼 바뀌지도 않는, 거의 똑같은 줄거리로 구성된, 삼류 영화 같은, 재미없고 지겨운 장면만 연속이었던 지난 나날들. 아버지는 커다란 입으로 어머니에게 벼랑에서 떨어져라 악담을 퍼부었고 굵고 힘센 손으로 악착같이 어머니를 벼랑 끝으로 떠다밀던 나날들.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술에 만취되어 정신없이 내뱉는 것이라고 어린 나는 착하게도 생각을 자꾸 고쳐먹기도 했지만, 워낙 반복해서 듣다 보니 그러한 말들이 정말 아버지의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그 어떤 확신에 몸을 떨던 나날이었다.
그 숱한 나날 중에서도 어머니가 무거운 그림자를 휘청거리며 찾아갔던 곳은 병원 응급실 이외에 또 다른 곳이 있었다. 바로 성모당이었다. 내가 어머니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그곳에 갔던 날은 아직도 나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한쪽으로 끈질기게 몰아세웠던 그날도 어머니는 꽤나 다급했던지 미처 슬리퍼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집에서 뛰쳐나갔다. 아버지 눈을 피해 몰래 신발을 손에 찾아 들고서 나는 어둠 속으로 어머니를 찾으러 나갔다. 골목 어귀에서 시커먼 그림자로 서 있던 어머니. 어머니는 발에 묻은 흙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 신발을 신고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그러면서 어머니가 나의 손을 잡고 어둠을 헤치며 찾아갔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성모당은 가로등 불빛 속에 고요히 있었고, 마리아상 앞에는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켜놓은 촛불이 어둠을 핥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둠이 빛을 핥는 소리인지 빛이 어둠을 핥는 소리인지 내 눈에는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에게는 신중하게 보이는 이 모든 동작들이 마치 아침 해를 불러오는 주술행위처럼 느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잔디 광장으로 올라간 어머니는 잔디 위에 풀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몸을 둥글게 말고 잔디 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어머니의 둥근 등을 내려다보았다. 한 무더기의 어둠이 얹힌 듯 어머니의 무거운 등이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눈물 많은 나와는 달리 좀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가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던 울음이 등을 타고 일제히 역류하고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어머니의 등 위에 켜켜이 쌓였다. 한참을 바닥에 엎드려 있던 어머니가 마침내 얼굴을 치켜들었을 땐 어느 때보다 맑고 편안한 얼굴 표정이었다. 주위에는 새벽기도를 온 몇몇 사람들이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그제야 어머니는 황망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아래로 잡아끌었다.
나는 처음 와 본 이곳이 이 세상과는 다른 별개의 먼 곳에 존재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성모당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보다 바깥으로 나온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인접해 있는 좁다란 샛길로 접어들었다. 어머니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머니는 이 길을 언제 와 본 곳일까? 이 좁은 길은 도대체 어디로 가 닿는 것일까? 의문 가득한 얼굴을 하며 나는 어머니 손을 세게 고쳐 잡는다. 어머니는 다시금 대단한 흥미라도 생긴 듯 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걸음걸이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활기찼다. 미로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샛길에서 어머니는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를 내며 그 어떤 주저함이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곤 어머니는 나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 듯 모를 듯한, 풀어나가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아인 빛도 없는 넓디넓은 바다에서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 일은 네가 상상해서 이 엄마한테 한번 이야길 해봐, 라는 느닷없는 주문을 하면서.
어느 바닷가 마을에 불 꺼진 등대가 있었단다. 불을 밝혀야 하는 시간이면 손에 술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며 호탕하게 웃고 있는 등대지기 남자가 있었거든. 그 남자는 술을 취해 등대에 불 켜는 것을 매일 깜박깜박 잊어먹었단다. 어떤 방법으로든 항구에 도착하긴 해야 하는 작은 배가, 어둡고 막막한 바다 위에 작은 배가 홀로 떠돌고 있었어. 불은 꺼져 있고 그 배는 파도에 자주 떠밀려 흔들리고, 그럴 때마다 또 어김없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라는 주문을 외우고 또 외우는 미련스러운 아이가 배안에 있었단다. 아이는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며 자라났어. 아이는 거친 파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도 그 속에서도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무한한 자유와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단다. 아이 옆에는 수평선 위로 피어오르는 흰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지. 그 여자는 아이가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 안중에 없는 듯 혼자 늘 이렇게 중얼거렸단다.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등대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때론 눈앞이 캄캄할 때도 있겠지. 당연히 방향이 없어졌으니 두려울 때도 있겠지. 그렇지만 이제 어느 방향이든 후회 없이 네 의지대로 노 저어 가면 되지 않겠느냐 고.
아버지는 술에 찌들어 만사가 귀찮은 표정으로 방안 담배 연기에 찌든 누런 방바닥에 힘없이 누워있을 때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그의 부재함으로 나는 숨이 막혔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람들을, 아니 어머니를 다그치며 몰아세울 때는 아버지의 그 무거운 존재감으로 또한 숨이 탁 막혔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집을 박차고 나와 친구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 돌아와도 술에 절어 있던 아버지는 방금 전에 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나의 이런 돌출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책잡히지 않게 사전에 모든 조치를 취해 놓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와 내가 앞 뒤 말이 맞지 않아 결국 아버지에게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들통이라도 나는 날이면 나의 책가방과 책들은 아버지의 손에 의해 마당에서 모조리 불태워지긴 했지만 말이다. 며칠 지나면 어머니는 어디서 구했는지 헌 교과서를 책상 위에 가만히 올려다 놓았고, 바쁜 아버지는 또다시 술 마시기에 하루가 짧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금지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 좀처럼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푸르런 창공 속으로 자유롭게 박차오르는 새를 바라보듯 먼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러한 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피해 자주 집에서 빠져나갔지만 결코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은 적은 없었다. 집에 무슨 거두어야 소중한 물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라면서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깊은 연민 때문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연민이라는 것이 사랑의 가장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는 누군가의 말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방금 무엇을 잘못 먹은 것처럼 속이 메스꺼워왔다. 대학교 때이던가. 꽤 오래 사귄 남자에게 나는 농담으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지 않았다. 무슨 얼어죽을 사랑타령이냐, 나는 사랑이란 종자가 어떤 종자인지 모른다, 요즘 아무리 흔해 빠진 게 그 놈의 사랑이라고들 하지만, 애초에 나는 그런 끈적끈적한 진액을 가진 종자의 싹을 키우고 싶지 않다, 단지 지금은 너를 조금 좋아하고 있을 뿐이라고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항상 들쩍지근한 사랑을 들먹이던 그 남자는 내 곁을 떠나갔다.

성모당에서 나온 나는 배에서 나는 꼬르륵거리는 소리에 그만 친정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내리쬐는 햇빛이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담을 끼고 왼쪽으로 천천히 따라 걸었다. 건너편에 남자 중학교 정문이 보인다. 학교 운동장에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여럿 보인다. 학교를 지나 문방구를 지나 조금 걸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꺾어지며 올라가는 샛길이 있으리라. 어릴 적 내가 어머니의 손에 끌려 따라다녔던 익숙한 샛길이었다. 길이 새끼를 치고 그 길이 또 다른 새끼를 치는, 비린내 나는,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려면 어깨를 비스듬히 비껴서야 하는 좁다란 골목이었다. 어떤 날은 막다른 골목에서 눈빛이 퀭한 중학교 아이들이 모여 앉아 담배를 빠끔빠끔 피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남녀가 급하게 떨어지며 서성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날도 있었지만 의외로 사람들이 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골목이었다. 늘 불안한 일상에 휩싸일 때면 성모당과 함께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곤 하던 곳이었다. 실로 몇 년 만에 와 보는 것인가? 샛길에 들어서니 벽이 허물어져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다. 그 구멍에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좁디좁은 골목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어디론가 숨고 있었다.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가는 것이 요즈음의 도심이 아니던가. 아마 창자 같은 샛길도 그 동안 많이 변했으리라.
잔뜩 긴장을 하고 길모퉁이를 돈다. 모퉁이를 돌자 기억 속의 골목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미로처럼 이어진 길이 어디론가 구불구불 달아나고 있고 그 길을 따라 집들이 다닥다닥 연결된 채 나지막하게 붙어 있다. 가다 보니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쓰러질 듯 미닫이문이 빠끔히 열려 있고 가게 진열대 위에는 과자봉지들이 지루하게 놓여 있다. 구멍가게 앞에서 일어났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어머니와 함께 이 구멍가게 앞을 지나가던 나는 우연히 땅바닥에 떨어진 커다란 눈깔사탕을 발견했다. 나는 앞서가던 어머니 손을 스르르 놓고선 오던 길을 되돌아가 그 눈깔사탕을 집어 들고 쓱쓱 대충 옷에 문지르고는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달콤한 액체를 막 목으로 넘기려고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어머니의 서늘한 눈빛. 바로 그 자리였다. 입가에 빙긋 웃음이 삐져나온다. 이상하게도 나는 단 것에 꽤나 집착했다. 돈이 생기기만 하면 집 근처 구멍가게로 달려가 알록달록한 눈깔사탕을 사서 은밀한 비밀 장소에 숨겨두고서 두고두고 녹여먹었다.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눈깔사탕은 불안하고 허전한 유년의 마음을 달래주기엔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군것질 거리였다.
사람들이 왜 이리 보이지 않는 것일까. 환한 햇빛 아래 모든 사물들이 말을 잃은 듯 사위가 조용하다. 갈림길이 나오자,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낯선 길로 들어선다. 이 길이 또 어떤 길과 연결될 것인지 호기심으로 괜스레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골목 구석구석에는 세상을 떠돌다 온 종잇조각과 쓰레기들로 지저분하다. 집 밖으로 난 푸세식 화장실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길은 이제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자그마한 사내아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끌고 올라온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지나오는 동안 처음으로 만나는 싱싱한 눈빛이다. 자전거 바퀴에는 햇빛이 무더기로 감겨 있다. 아이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아이는 나를 보자 고개를 푹 숙이며 지나간다. 내 반가운 표정이 아이에겐 뭔가 조금 거북했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아이의 눈길이 나에게로 향해 있다.
어머니와 함께 다녔던 샛길은 내가 홀로 다녔던 길과 함께 기억 속에 어지럽게 엉겨 있다. 골똘히 생각할수록 그 길들은 내 기억 속에서 더 뒤엉키기만 한다. 나는 발끝에 잔뜩 힘을 주고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길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고 사람들의 말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는 듯하다. 거의 골목 끝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고 또 다른 누군가가 119로 연락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 사이로 쓰러진 노인네의 모습이 보인다. 주름투성이의 남루한 노인이었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온다. 노인네 옆에 놓인 지팡이만이 노인이 가고자 했던 길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뿐 뜨거운 햇빛은 노인의 옷 위에 수북이 꽂혀있다. 잔뜩 벌린 노인의 입안에는 어둠이 그득하다. 시큼한 어둠의 냄새가 나는 듯하다. 입안에는 다 합해도 몇 개 되지 않는 이가 듬성듬성 드러나 있다. 노인네의 얼굴은 취기에 붉다 못해 오히려 검은 빛이 돈다. 노인의 무표정하고 굳은 얼굴을 한동안 내려다보다 외면하듯 나는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온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인해 귀속이 자꾸 간지럽다. 길바닥이 하얗다. 나는 눈을 뜰 수가 없다. 햇빛이 눈동자를 찌른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듯하다. 휙휙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내 기억을 일시에 끌고 가 버린 듯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다. 나의 팔다리가 방향 없이 허둥거린다.
멀리 학교건물 같은 것이 보인다. 샛길을 걷던 어머니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고 동시에 뭔가 먹고 싶은 왕성한 식욕을 느낀다. 어머니처럼, 미로 같은 골목길 위에 들어서면 다시금 생에 대한 커다란 흥미라도 생기는 것인지……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외마디 웃음이 튀어나온다. 길 가장자리 주차장에는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주차해 있다. 그 가운데 한 쪽 귀퉁이가 움푹 찌그러진 자동차가 눈에 잡힌다. 군데군데 녹이 슬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걸로 봐서 오래 방치된 폐차 같다. 여러 명의 동네 아이들이 차 위에 올라타거나 혹은 차안을 기웃거리며 뭔가를 찾아내려 하고 있다. 자동차 부품이 빠져 버린 녹슨 자리에는 햇빛이 구석구석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나는 폐차 위로 뛰어올라 저 깔깔대는 아이들처럼 마음껏 발을 구르고 싶다는 충동이 불현듯 일어난다. 차 위로 왼손을 쭉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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