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40호 원고 / 수 하
1)라만차
며칠째 라만차의 꿈을 꾼다
스페인의 비구름은
비틀비틀 바람에 실려오다가
황량한 라만차에 오면
마침내 소낙비가 된다지
바람이 시를 읊는 묵시의 땅
스페인 라만차에 오면
늙어서 덜커덩거리는
세르반데스의 풍차를 만난다
풍차를 보고 달려드는
라만차의 기사여
아무도 못죽인 칼을 휘둘러
오늘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다 죽여다오
그러면 온 세상은
행복한 사람들만 남지 읺을까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도
우리는 아직도 행복하지 못하다
2)반딧불이 놀이
어릴적 고향 산골 마을엔
유령의 눈처럼 마을을 배회하는
반딧불이들이 떠돌고 있었다
깜박이며 천천히 날고 있는 반딧불이
깡총깡총 열댓마리 잡아서
커다란 호박꽃 속에 넣고
막대에 묶어 밤길을 비추는
등불놀이도 하고
눈꺼풀 위에 붙이고 친구들 놀리는
귀신놀이도 하였다
별이 밝은 여름밤마다
동네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반딧불이들을 보며
은하수를 건너가서 별 하나씩 물고
우리동네를 찾아 온다는 상상을 했다
온 하늘로 별이 쏟아지던 산속마을
깜빡이는 반딧불이 가득한
전기도 라디오도 없던 두메산골
까까머리 어린 소년의 꿈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반딧불이처럼
어쩌다 생각나는 동화같은 추억만 남았다
3)대숲에서
물소리 따라 대숲에 드니
나무가 말을 걸어 온다
몇살이냐 어디서 오느냐
눈을 맞추며 고개 끄덕여 받아 준다
행성은 늘 신기하다
댓잎은 슥삭이고
가지는 툭탁이며
만물의 속 깊은 언어로
숲속을 울린다
나무들도 서로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견뎌온 얘기들
옆구리의 깊은 상처가
언제 생겼는지 얘기하겠지
대숲에서 놀던 새들 몇 마리
무슨 얘길 들었는지
한참이나 지지배배 웃더니
잽싸게 공산으로
날아 오른다
4)뱅고니
킬리만자로 세렝게티 초원에 살고있는
마사이족의 뜀뛰기 춤을 보았다
네겹으로 줄을 서서 뜀을 뛰면
흙 먼지 사이로 인도양이 출렁거렸다
하루에 한 두끼만 먹는다는 뱅고니아이들
그런것 아랑곳없이 웃고 떠들며
아프리카의 주인으로 살고 있었다
세렝게티 생명 그 천연의 모습으로
잠시나마 쳐다본 뱅고니의 가난
바오밥나무 아래 배고픈 짐승 한 마리
황급히 지나간 흔적처럼
흙투성이 뱅고니를 도망친 세월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고있는
어린 마사이족 언제 다시 만날까
다시 한번 맨발로 뜀뛰기 같이 하면
기울어진 지구가 바로 되지 않을까
5)그 다음
잠깐 고개 돌릴 사이에
거짓말처럼 산 뒤로
꼴깍 넘어간 저녁해가
숨 넘어가는 사람처럼 무서웠다
애초에 없었던 것 처럼
잊혀지고 지워지고 덮여버리는 인생
산 자와 죽은 자의 사이가 너무 멀어
살아 있을 때 까지만 사람일 뿐
우주에 별들이 얼마인지 몰라서
별들의 나이가 얼마인지 몰라서
자신의 존재가 두려웠던 파스칼처럼
죽음 그 다음을 무서워만 하지
모두 다 바쁜 세상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은 어느틈엔가
나를 앞질러 가며 손짓하고 결국
그 다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노을을 받은 내 인생도
소나무껍질처럼 붉게 번쩍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