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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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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03 18:14

낯선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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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향기 <br><br><br>                                                                                                    신상조  <br><br>  <br>  <br>  자정부터 여명까지의 시간이 환자들에겐 가장 고통스럽고도 지루한 시간이다. 낮 동안 몸속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통증은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그들의 몸을 밤새도록 질근질근 짓이기고 있을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통증이 따라붙은 그들의 꿈은 바닥 모르게 어둡다.<br>  남자는 눈을 들어 노모의 링거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해본다. 더 이상 바늘을 꽂을 데가 없을 만큼 환자의 혈관이 여기저기 만신창이가 되고 난 뒤에야 병원에서는 장기간 주사바늘을 꽂을 수 있도록 작고 가느다란 튜브를 그녀의 혈관에 시술했었다.<br>  하루 두 차례 노모에게 투여되는 알부민은 그녀의 목숨을 지탱시키는 마지막 힘이다. 마치 시지프의 돌덩이처럼 노모의 체력은 약물의 힘으로 한 발 한 발 위를 향해 기어오르다가 어이없이 바닥으로 곤드라지곤 한다. 반항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하는 방법이라면, 노모에게는 지루하게 투입되는 노란색 액체가 자신의 현실에 반항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br>  환자들은 때로 죽음만큼 삶이 두렵다. 불치의 병은 마치 오랫동안 이혼을 남몰래 준비한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한다. 저 사람과 언제 한 이불 밑에서 따뜻하게 살을 부비며 살았던가, 싶게 냉정하게 돌아선 배우자처럼, 육신은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적의를 드러내기까지 한다. 그 순간 환자가 느끼는 무기력함은 삶을 지탱해나갈 용기를 뺏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의 결여 내지는 부정일 것이다. <br>  노모는 남자가 말귀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만한 나이가 되고부터, 자신은 노후를 조용한 절에서 지내다가 죽음을 맞고 싶다, 고 그에게 누차 말해왔었다. 그렇다고 노모가 불심이 특별히 돈독한 것은 아이었다. 차라리 맹목적인 정성에 가까운 노모의 본능적 신앙심은 미신 쪽에 훨씬 치우쳐있었다. 남자는 노모가 말하는 절이 일반적인 산사를 말하는 것인지, 절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으나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는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겁이 나고 조금 슬펐지만, 나이가 들자 아들의 효심을 확인해보기 위한, 일찍 혼자가 된 엄마의 투정쯤으로 여겼다. <br>  그러나 오랫동안 아들을 혼자서 묵묵히 길러낸 것처럼, 노모는 타인들에 의해 확일 될 뿐인 절대적 종말인 자신의 죽음조차도 스스로 책임져야할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br>  그러므로 약물은 노모의 혈관을 타고 돌다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왜 이 육신은 내게 협조하지 않는가. 자신에게 닥친 위험에 이토록이나 반항하지 않는가.<br>  708호실에는 남자의 노모 외에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결함을 갖고 태어났다는 돌이 갓 지난 사내아이와, 일흔 살의 노파가 입원해있다.<br>  병원의 앞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에 노모의 침대와 아이의 침대가 머리를 창쪽으로 둔 채 거리를 두고 양쪽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세면실을 겸한 화장실이 있는 병실 안쪽으로 일흔의 노파가 누워있다.<br>  당뇨를 앓아서인지 넘어져서 부서진 엉치등뼈가 반 년째 덧나기만 하고 낫지를 않는 노파는 침대에 닿은 등과 엉덩이 쪽에 욕창이 심했다. 젊어 한때, 금슬이 좋을 땐 갈치 가시를 발라서 아내의 밥숟갈에 얹어주기도 했다는 영감님은 병원에는 어쩌다 한번씩 들를 뿐이었고, 영원히 철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대학원생 아들이 병원을 데이트 장소 삼아 애인과 자주 들락거렸다. 하관이 빨아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그의 애인은 언제까지든 애인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아들의 팔에 매달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노파를 내려다보곤 했다. 노파의 간병인도 환자의 무섭게 번지는 욕창만은 어째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제 저녁 어려운 시간을 내 아이를 업고 지방에서 올라온 노파의 맏딸은 엄마의 등 쪽에 난 욕창을 보고는 질린 표정으로 돌아서서 울었다. 마음 쓰이는 만큼 친정을 보살피기에는 그녀에게 딸린 아이들이 너무 어렸고, 모시고 사는 시댁어른들은 너그럽지 못했다.<br>  환절기였다. 소아과병동은 폐렴이나 뇌수막염을 앓고 있는 아이들로 입원실이 이미 만원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노모 맞은편 침대에 누운 아이의 부모는 남자의 노모가 입원한 내과병동에 임시로 방을 잡아야만 했다.<br>  아이의 부모는 이제 겨우 이십대 초반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대학생인 동네 오빠에게서 임신을 했다. 사고를 저지른 본인들보다 더 황당해한 양쪽 집에서 부랴부랴 그들에게 살림을 내주지 않았더라면, 육 개월이나 자란 태아는 산부인과에서 사지가 잘려진 채 엄마의 자궁 속에서 꺼내졌을 것이다. 아직 학생 신분인 아이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이의 젊은 할아버지가 그들 세 명의 생활비와 아이 아버지의 학비와 지금은 아이의 병원비까지를 부담하고 있다. <br>  병역의 의무도 아직 마치지 않은, 앳되고 순해 보이는 아이의 아버지는 피곤하고 심약한 기색으로 저녁나절 내내 병실을 지켰다. 그는 학기말시험을 준비하느라 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봐야했지만 아내와 교대로 아이를 틈틈이 돌봐야했다. <br>  그가 병실을 지키는 동안 그의 지나치게 젊은 아내는 병원 구내매점에서 컵라면과 달디 단 던컨도넛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올 것이다. 지나치게 젊은 아내이자 엄마인 그녀는 병원에서 제공되는 밥이 좀체 식성에 맞지 않는다. 오늘 그녀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들르는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서 도시락을 좀 싸와달라고 투정을 부렸었다. <br>  그런 보호자들과 함께 병실을 쓰게 된 것이 남자에게는 그다지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환자를 돌보다보면 간병인을 쓴다하더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의 일들을 다른 보호자에게 믿고 부탁할 경우가 많은 법이다.<br>  아이의 엄마는 병실의 TV가 꺼진 무렵부터는 갖고 온 휴대용 라디오로 음악방송을 청취하곤 했다. 아이의 고통을 온몸으로 체휼하기에 그녀는 또한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녀는 아이가 깊이 잠들었을 때면 휴대전화로 자신의 친구나 아이의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거나 낙서를 하곤 했다. 이어폰을 꽂지 않은 그녀의 라디오에선 아직도 음악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지나치게 젊은 아이의 엄마는 깊이 잠든 듯하다.  <br>  남자는 흡연구역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올까 하다가 음악에 잠시 발이 묶인다. 영화 <체리향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들었던 음악이던가?<br>  그는 이즈음 영화에 심취해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보다는 영화를 함께 보는 여자에게 관심이 더 많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는 시간이 남자의 유일한 휴식시간인 것만큼은 사실이었다.<br>  사내(社內)의 모임 중 하나인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회원들은 회사 시청각실에서 매달 둘째와 넷째 주 화요일 저녁 일곱 시 반, 각각 한 편씩 제 삼 세계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난 뒤 그날 본 작품에 관해 회원들끼리 가벼운 토론을 벌였다. 회원 중 누구도 영화에 관련한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토론은 거의 지지부진하거나 때로 참신했다. 토론은 삼사십 분을 넘지 않았고, 형식에 불과했으며, 때론 서로의 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지기도 했기에 아무도 그 시간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br>  남자는 여자가 회원이란 이유만으로 자석에 끌리듯 스스로 그 모임의 회원이 되었다.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남자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br>  이란이 낳은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어디에 그런 동양적 감수성이 숨어있었던가. 영화는 엔딩크레딧 부분에서 방금 남자가 들었던 느리고도 유장한 멜로디를 흘렸었다. 영화의 서사적인 결말이 확연하지 않는데서 오는 충격에, 음악이 주는 먹먹함까지 겹쳐 자막이 올라가고도 한참을, 회원들은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었다.<br>  그런데 그날 무엇 때문이었던가? 감동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눈물을 짜낼 정도였던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여자의 눈자위가 붉었었다. 여자는 토론이 시작되고도 한참동안 손에 쥔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br>  남자는 영화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것은 자살하려는 한 중년 사내의 이야기였다.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왜 자살하려는지 알 수 없는 이 사내는 자신의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사내가 원한 도움이란 그가 죽은 다음날 아침에 와서 자신의 주검 위에 흙을 덮어 달라는 것이었다. 한 노인만이 비로소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노인은 사내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br>  노인도 예전에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 동트기 전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목을 매달 밧줄을 든 채 올라간 나무는 체리나무였고, 무심코 그 열매를 따먹어 보니 너무 향기롭고 달더라는 것이다. 그 맛과 향에 취해 계속 따먹고 있자니 어둡기만 하던 세상이 왠지 밝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이윽고 여명이 와 산등선 너머로 붉은 태양이 장엄하게 떠올랐고, 이어서 학교 가는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체리를 한 바구니 따서 돌아오니 아직까지 그의 아내는 자고 있더라고…. <br>  이야기를 마친 노인은 사내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체리의 향기를 포기하고 싶소?”<br>  남자는 옅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는 노모를 돌아본다. “얘야, 이제 그만 이리 와서 내 위에 흙을 덮어주렴.” 남자는 노모가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그를 향해 손짓할 것만 같아 얼른 고개를 돌린다. <br><br>  여자는 대학을 졸업한 그 해 남자가 다니는 회사에 입사했다.  그의 회사는 메모리 중에서도 낸드플래시메모리를 주요 품목으로 생산해서 내수시장에 판매하거나 외국으로 수출하는, 규모가 그다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기업이었다. 플래시메모리는 내부방식에 따라 NOR 형과 NAND형으로 나뉘는데 낸드플래시메모리는 SD카드, Memory stick, 디지털카메라, MP3 등에 주로 쓰이는 부품이었다. <br>  여자가 입사한 때는 그동안 메모리 시장에 뒷짐을 지고 있던 국내외의 덩치 큰 전자업체들이 본격적으로 그 종목에 뛰어든 직후였다. 날마다 매스컴에선 기존 관련업체들의 타격에 관해서 한목소리로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혹시 정부가 나설 문제는 아닌가요?” 그렇게 묻는 기자에게 정부관계자는 ‘자유경쟁 부분’을 얘기했었다. 뿐만 아니라 메모리 시장에 대해 국내외 대부분의 증권사들이 목표주가를 올리는 것과는 예외적으로 JP모건 같은 곳은 메모리 시장 자체의 성장률 침체를 예견하며 투자의견을 ‘비중확대’에서 ‘중립’으로 하향조정했음을 밝히기까지 했다. 남자의 회사에서도 본사를 제외한 공장 전체를 보다 더 인력이 싼 중국으로 옮겨야만 된다는 의견이 실제 진행 중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누구든 중국으로 몇 년씩 나가있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br>  그렇게 뒤숭숭한 때에 입사한 여자는 모두에게 새로 들여온 사무용 의자만큼이나 심상했다. 눈에 띄는 일을 맡은 것도 아니었고- 여자에게 맡겨진 업무는 허드렛일에 가까웠다 -시선을 끌만큼 도드라지게 예쁘거나 튀는 구석도 없는 평범한 용모였다. <br>  남자는 여자들을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거나 대수롭잖은 우스갯소리로 처녀들의 환심을 살 만큼 성격이 활달하지 못했다. 그에게 여자는 두 종류였다. 자식을 끔찍이도 위하는 홀어머니와 언젠가는 그들 앞에 나타날 선녀가 있었다. 지극히 비현실적이게도, 그는 첩첩 세상에 묻힌 스물여덟 살이나 먹은 나무꾼이었다.<br>  그런 남자가 보기에 여자는 아주 검소했다. 그녀는 화장을 드러나게 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세히 보니 금속의 장신구를 걸치지도 않기에 남자는 그녀가 무엇엔가, 그리고 누군가에게 빠지면 끝없이 집착하는 내성적인 성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얼핏 했었다. 게다가 여자는 누군가 무리한 부탁을 해도 정면으로 거절을 한다든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요구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좋게 봐서는 얌전한 성품이었고 달리 보자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그런 점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br>  남자가 여자에게 본격적으로 주목하게 된 때는 여자가 쓴 수필 비슷한 글이 사보에 실린 것을 읽고난 뒤부터였다. 그녀의 글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난에 실린 글로서 왜 자신의 취미생활이 영화가 됐으며, 영화를 보는 것이 삶에, 나아가서는 회사생활에 어떤 활력을 주는 지에 관해서 쓴 글이었다. 여자가 자진해서 글을 썼는지 마지못해 그 일을 맡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br><br>  마당엔 풀이 무성했다. 그 여름 내내 뒤란엔 햇볕이 들지 않았고, 장마가 지난 대청마루 아래에선 썩은 개흙 냄새가 났다. 장마는 엄마의 생선들에 알을 슬었다. 비가 오면 엄마는 읍내에 있는 시장 어귀에 좌판을 펼칠 수 없었다. 배가 고픈 동생은 날마다 흙을 집어먹었다. 날마다 흙을 먹던 동생은 어느 날 배가 아프다며 몹시 울었다. <br>  좌판을 펼칠 수 없는 날이면 엄마는 생선이 든 목판을 이고 멀리까지 행상을 나갔다. 동생은 자꾸만 울었고, 나는 그 애를 업고 나가 골목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서성였다. 땀과 눈물로 끈끈해진 나와 동생의 목덜미에선 쉰내가 났다. <br>  “우리 애한테 물 한모금만 먹여봐 주소.” 그날, 실성한 듯 엄마는 식은 동생의 몸을 부둥켜안은 채 자꾸만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그 애의 주검을 엄마에게서 강제로 떼놓을 때까지.<br><br>  이처럼, 여자 특유의 다소 감상적인 회상 끝에 여자는 동생이 죽기 얼마 전 그 애를 포함한 식구들이 어쩌다 영화를 보게 된 날에 대한 이야길 했었다. <br>  그 날은 비가 오지 않는 화창한 날인데도 엄마가 쉬는 날이었다고. 제목도, 줄거리도, 주인공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만큼은 선명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들은 천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주렴처럼 드리워진 수양버들 사이로 노을이 홍옥보다 발갰었다고 했다. 읍내 중국집에서 파는 자장면 대신 엄마가 석유곤로에 물을 끓여 국수를 삶아줬는데 멸치국물도 들어있지 않던, 간장으로만 맛을 낸 그 국수가 지금도 눈물나게 먹고 싶다는 말도 썼었다. 그리고 여자는 지금도 영화를 볼 때면 언제든 동생과 동행하는 심정이라고 했다. 영화관을 나서면 다시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노을빛에 얼굴을 물들이며 함께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심정이 된다고도 썼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이 매번 쓸쓸해서, 너무나 쓸쓸해서 다음엔 영화를 보지 말아야지, 결심하곤 했다고.<br>  이 모든, 여자에 관한 인상들은 자신의 낯선 감정에 대한 남자의 어색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단 한번의 일별만으로도 사람은 타인에게 끌릴 수가 있는 것이니까. 감정은 그토록 단순하다. 그러나 왜 그 스침이 그토록 가슴 떨리는 체험으로 다가오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끌림과 몰입의 감정은 설명할 수 없도록 복잡하기도 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경멸스런 요소들을 상대방이 두루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것 또한 욕망에 얽힌 사랑이란 감정인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사랑이란 성욕에 성욕, 그리고 그 성욕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한 것일 뿐이라고.<br>  남자는 여자에게 회사의 시청각실이 아닌 시내의 영화관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떨지 물어보고 싶다. 그보다 먼저 차나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일 것이다. 그러다 몇 번의 만남 뒤에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친숙해지면 병실에 있는 모친에게 여자를 데려가고 싶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의 데이트신청을 승낙할지 거절할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여자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아는바가 없다. 그는 한 달에 두 번, 두 번째와 네 번째 화요일에 여자를 포함한 회원들과 나란히 회사 문을 나선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간혹 갖는 뒤풀이 모임에선 때로 여자의 옆에 앉아서 가볍게 술을 마실 때도 있다. 그는 아직 여자와 몇 마디 이상의 이야길 나누어본 적이 없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너무 무뚝뚝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한다. 남자와 눈길이 마주칠 때면 그녀는 남자에게 설핏,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닐까? 남자는 자신이 좀 더 그녀에 대해 용기가 없음이 못내 못마땅하다.<br><br>  생각보다 늦어질 것 같다는 전화가 A로부터 걸려온 지도 벌써 시간 반이 지났다. 여자는 찬물에 밥을 조금 말아 무말랭이와 콩자반 그리고 구운 김을 곁들여 늦은 저녁을 먹는다. 식사가 끝나면 간단한 설거지를 마친 뒤 가스렌지에 불을 붙여 물을 끓인다. 아주 늦은 밤에도 그녀는 종종 커피를 마신다. 다만 저녁이나 밤중엔 크림과 설탕을 넣지 않은 담백한 커피를 마신다. <br>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신다고해서 여자에게 아예 잠이 오지 않는 법은 없다. 그러나 커피를 마시지 않은 때라도 그녀는 언제든 깊이 잠들지 못한다. 자다가도 서너 번씩 깨는 피곤한 잠은 꽤 오래 된 여자의 습관이다. 그녀는 아이를 업고 있는 꿈을 자주 그리고 반복적으로 꾼다. 누군지 알 수 없게 얼굴이 불분명한 아이는 덩치가 너무 커서 버겁거나, 애처로울 만큼 가볍다. 여자는 아이를 업고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신작로를 무작정 걷곤 했다. 꿈속에서도 내리쬐는 뙤약볕은 뜨거웠다. 때론 벼랑과 벼랑 사이에 걸쳐진 출렁다리를 아이를 업은 채, 혹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건널 때도 있었다. 매번 위험하고 힘들었다. <br>  그녀는 냉장고에 찬 맥주가 남았는지 그리고 A가 좋아하는 치즈안주가 조금 남았는지 확인한 뒤 이빨을 닦고 머리를 빗는다. 화장실에선 썩은 시궁창 냄새가 역류하는가 보다. 언제부턴가 불쾌한 냄새가 났다. 여자는 변기 아랫부분의 갈라진 틈을 흰 시멘트로 꼼꼼히 발라도 보고 청소용 세제를 물에 풀어 배수구에 부어도 봤지만 냄새는 좀체 가시질 않았다.<br>  A는 진한 체취를 좋아한다. 그는 심지어 여자에게 샤워 전 관계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는 언제나 성급하게 옷을 벗고, 애무도 없이 곧바로 그녀에게 들어온다. “어때, 기분 좋아?” 행위 때마다 되풀이되는 그의 질문은 그런 행동만큼이나 조급하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냉랭해진 느낌이 들 때면 그의 행위는 길어지기도 한다. 마지막엔 어김없이 그는 여자의 머리칼을 두 손으로 움켜쥔 뒤 다소 요란스런 신음과 함께 사정을 한다. “넌 언제나 젖어있어서 좋아.” A는 말한다. “널 볼 때마다 내가 매번 발기하는 게 신기하지 않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A에게 애매하게 웃어 보인다. 여자는 그가 자신의 아내 앞에선 발기불능으로 가끔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br>  A의 아내는 정숙하다. 그는 아내를 신뢰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마,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므로 강박증이 심한 남자답게, 그의 육체는 그런 아내에 대해 무기력하다.<br>  또한 A는 매사에 조심성이 많다. 그는 교양 있는 아내에, 예의범절이 깍듯하며 꽤 학교성적이 좋은 자식이 둘씩이나 있다. 국가와 관련한 직장에서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승진을 했으며 최근에는 골프에 한창 맛을 들였다.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는 가정의 안정을 원한다. 자신의 원만한 가족관계가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젊은 애인이 떠날 것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br>  여자는 A가 우려하는 많은 것들을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 중에서 지켜내야 될 것이 많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그의 그런 소심하고도 냉정한 처신이 전혀 밉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br>  그 또한 자신의 그런 행동 때문에 여자가 서운해 하는 것을 모르진 않았으므로 언제나 다음엔, 이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이번 주말에 우리 같이 영화 보러가지, 다음에 어디 근사한데 가서 같이 식사나 할까, 돌아오는 연휴엔 꼭 바닷가에 가서 회 한번 먹고 오자. 그리고 약속했던 그 다음의 시간이 다가오면 A는 갑자기 바빠졌고 아내의 눈치가 전보다 달라졌다고 불편해 했다.<br>  여자는 A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싫었으므로 언제든 스스로 한발 물러설 줄 알았다. 바닷가로 떠나기 겨우 몇 시간 전 그녀는 갑자기 복통을 일으켰었고, 어느 날은 근사한 식당을 앞에 두고도 결국 택시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러고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택시 안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랬으므로 사정이야 어찌됐든, 여자의 거절이나 불이행으로 모처럼 세운 계획이 엉망이 되고 만다고 A는 항상 투덜거릴 수 있었다. <br>  게다가 여자의 이렇듯 고집하지 않는 성격은-사실 그가 원하는 바임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그를 불안케 했음으로 진부하고도 우스꽝스런 불평을 자아내게 만들곤 했다. <br>  “넌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가 정색을 하고 이렇게 진지한 듯 물어올 때마다 “그런 당신은?”이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여자는 애써 그 말을 눌렀다. 사랑이란 말은 그녀에게 낯선 벌레를 만진 듯한 불쾌함과 거부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고,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에게만 허락되는, 자신의 그런 이미증(異味症)적인 감정을 애써 설명할 길이 없었다.<br>  또한 A는 여자에게 언제나 일방적이기도 했다. 여자가 ‘영화를 사랑하는 모임’에서 <체리향기>를 보던 날이었다. 그날 여자는 생리 중이었다. 또한 그가 부르기만 하면 무조건 달려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몹시 지겹고도 끔찍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음으로 설정한 휴대전화기는 여자의 가방 안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그녀를 끈질기게 호출했지만, 그날따라 여자도 A의 전화를 고집스레 받지 않았다. <br>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아직 앳된 나이의 군인들이 천진스런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여자보다 겨우 한두 살 적거나 혹은 비슷한 나이였다. 영화처럼, 젊음은 태양 아래 익어가는 체리열매보다 붉고 싱그러워야했다.<br>  동생은 여자와 나이 터울이 무려 일곱 살이나 났다. 게다가 동생은 크면서 행동이 메뜨고, 말을 배우는 것도 나이에 비해 아주 느렸다. <br>  여자의 부모는 시장에서 앉은장사로 생선을 팔았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는 아버진 비교적 쑤걱쑤걱 성실했다. 그러나 어쩌다 술잔거리라도 생겨 낮술을 한번 마셨다하면, 끼니도 거른 채 꼬박 한나절을 마셔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딸을 학교로 보낸 후 집안일을 재게 마친 엄마 또한 남편이 있는 가게로 바쁘게 달려갔다. 그들의 부모가 손 맞게 부지런을 떠는 것과는 상관없이, 가게는 목이 좋지 않아 장사는 근근부지했다.<br>  방과 후면 동생을 돌보는 일은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보통의 그 또래들처럼,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친구의 집에서 숙제를 같이 하거나, 휴일이면 그들과 시내를 쏘다니며 상점을 기웃댄다든지, 분식가게에서 매운 떡볶이를 사먹고 싶었다. 여자는 일주일에 두 번 보습학원을 다녀올 동안은 동생을 혼자 두었다. 때론 그녀의 모자라고 행동이 굼뜬 동생을 성가셔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데리고 다닐 때마다 동생은 바투 따라오지 못하고 누나의 애를 매번 태웠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아이의 등을 후려치고 싶었다.<br>  그날, 동생은 아침부터 열이 나고 기운이 없었다. 그러다 오후에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칭얼대는 동생을 야박스레 떼놓고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라 납빛으로 짙어지기 시작한 어둠이 여자에겐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에선 늘 왕왕대던 TV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서, 그녀는 그 낯선 조용함이 지레 걱정스러웠다. 동생은 차고 얇은 비닐장판 위에 이불을 둘둘 만 채 엎드려 있었다. 기진한 아이의 눈은 열에 들떠 흐릿했고, 쉬지 않고 흘러내린 침으로 턱이 벌겋게 헐어있었다.<br>  여자의 집은 동네 맨 꼭대기에 있었다. 자정도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동네에서 불빛이  새나는 집은 여자의 집 밖에 없는 듯 했다. 불이 꺼진 시커먼 집들을 내려다보면서 여자는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숨죽여 울었다. 차고 축축한 흙에서 냉기가 올라왔고 담벼락에선 오줌지린내가 났다. 가끔 어둠 속에서 동네 개들이 일시에 짖곤 했다. 동생을 들쳐 업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간 부모는 그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br>  언제나 철없는 자식들만 집에 둔 것이 마음 아팠던 부모는 딸에게 왜 진작 연락하지 않았냐고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낮에 가게의 월세 문제로 가볍게 부부싸움을 했었다. 밤늦게 퇴근하는 아버지의 몸에선 생선 비린내와 함께 역한 술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자책했다. 배가 아픈 동생을 두고 가지 말아야했다고, 몇 시간씩이나 나가 있지 말았어야 했다고, 업고 달랬어야만 했다고…. <br>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언제부턴가 여자는 자신이 칭얼대던 동생을 업고 그날 대문 앞에서 정말로 서성인 것만 같았다. 지친 몸으로 생선비린내를 풍기며 시장에서 돌아오던 부모를 그렇게 울며 맞이했던 것 같기도 했다. <br>  여자는 침울하고, 죽은 동생처럼 메뜨게 되었다. 밥상머리에서 유별난 반찬에 젓가락이 저절로 갈라치면 그녀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런 자신을 뻔뻔스럽게 생각한다고 느꼈다. 부모가 그녀에게 사 준 옷이나 가방을 보고 기쁜 표정을 짓는 것도 염치없는 짓 같았다. 여자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면 그녀는 차라리 그들이 학교에 나타나지 말았으면, 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 특히 수많은 판단과 무수한 선택의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에 손을 들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여자는 스스로를 마치 하찮은 벌레 같이 느꼈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서 자꾸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갈수록 그것이 편했으므로 자기가 한 거짓말을 스스로 믿게 되었다.<br><br>  나뭇잎이 떨어진다, 떨어진다 멀리에선 듯,<br>  하늘의 먼 정원이 시드는 것처럼, <br>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br><br>  그리고 한 밤 중 무거운 지구가<br>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br><br>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br>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br><br>  그러나 어느 한 분이 계시어, 이들 낙하를<br>  한없이 부드러운 그의 손으로 받아들인다. <br><br>  병원 엘리베이터 안에는 릴케의 ‘가을’이란 시가 여뀟과의 일년초 식물인 고마리를 배경해서 엽서체로 인쇄되어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날씨가 완연히 가을이었다. 남자는 그 시를 읽게 될 환자들이 ‘낙하’란 다소 예민한 어휘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인지, 두려움의 시선을 거두고 위대한 어느 한 분의 ‘손’을 느끼고 위로받을 것인지 잠깐, 생각해본다.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었을 그 시의 선정자는 육체가 약해지면 사람들의 마음도 따라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경험하지 못한 이가 분명할 것이다. 남자는 아직 건강한 자들의 그런 무신경이 언짢다. <br>  그의 노모는 다소 여리고 예민했지만, 따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반신에 고무를 끼운 채 수레를 미는 걸인, 혹은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걸어가는 맹인과 같은 사람들을 남자가 유심히 돌아볼 때면, 그녀는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소리로 어린 아들을 꾸짖었다. “몸이 불편한 분들을 그렇게 쳐다보는 건 잘못이란다.” <br>  그녀에게 세상은 사랑을 베푼 만큼 사랑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타인에게 끼친 해는 어디에다 뿌리를 내렸다가 언제 그 싹을 틔울지 모르는 독초와 같았다. 그러나 굳이 되돌아올 해가 두렵다기보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남에게 아픔을 주는 것을 못 견뎌했다. <br>  부드럽고 동정심이 많은 모친의 행동은 늘 아들의 일상을 싸고돌았으므로 남자의 무의식에 깊숙이 새겨졌다. 비록 자라는 과정에서 그녀가 모르는 시간과 공간, 그로인한 경험들이 아들에게 있었다한들 천성은 내용과도 같았다. 그것은 형식처럼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길 부끄러워했으므로 그들의 눈엔 다소 무뚝뚝한데다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남자로 비쳤다.<br>  심장병을 앓던 아이는 오후에 소아과병동으로 자리를 옮긴 뒤라 노모의 맞은 편 침대는 비어있었다. 노파의 보호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br>  “낮에 네 고모가 들렀다 갔어. 죽을 쑤어 왔던데 너도 좀 먹으련?” 노모가 앓고 난 뒤부터 지척에 살던 그녀의 손아래 시누가 남자의 집과 병원을 드나들며 환자의 병구완과 남자의 치다꺼리를 해주고 있었다. <br>  “얘, 저 분 아들은 이번 가을에 식을 올린대나 보더라.” 까부라진 듯 잠든 노파를 건너다보며 노모가 말했다. 남자는 말없이 이불깃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준다. <br>  “나이가 들수록 넌 네 아버질 빼닮는구나.” 노모는 링거바늘이 꽂히지 않은 오른 손을 들어 남자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올을 쓸어 올렸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그 모습을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다 담겠다는 듯 깊고 그윽하다.<br>  “아버진 지금 네 나이에 결혼을 했다. …… 너는 왜 여자를 사귈 생각을 안 하니?” 한참을 뜸 들인 뒤에야 노모는 뒷말을 이었다.<br>  “난 네게 짐이 되는 게 싫었어. 혼자서 외동아들을 키운 시어머니란 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도 잘 알고.” <br>  남자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슬쩍 이마에 주름을 잡은 채 노모를 바라본다.<br>  “근데 이렇게 아파서 결국 네게 짐을 지우는구나.”<br>  “어머닌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되돌려 받는 것을 언제나 거북해하셨어요. 반면에 베풀기는 좋아했지만.” “내가 그랬니?”<br>  노모의 눈엔 손질한 지 오래된 듯한 아들의 머리가 오늘따라 헙수룩하다. 남자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다 내리는 그녀의 강파른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환자복은 여윈 노모에게 자루처럼 헐렁하다. 그러나 복수(腹水)가 찬 노모의 배만은 산달이 가까운 임산부처럼 둥실했다.<br>  “그런 점에서 어머닌 참 이기적이세요, 그거 아세요?” “그래, 맞아. 엄만 이기적이야.” 노모는 아들의 억지에 소녀같이 웃는다. <br>  남자는 노모의 처녀 때 찍은 흑백사진을 기억한다. 그녀는 두터운 스웨터에 폭이 넓은 플란넬치마를 입은 모습으로 나무에 기대어 살짝, 그 가지에 손을 얹었다. 먼 데를 바라보며 미소를 띤 환한 얼굴은 나잇살이 빠지지 않아 적당히 둥근데다가, 눈빛은 다소 장난기가 많아 보이기까지 한다. 등 뒤로 흘러내린 그녀의 야청빛 머리채는 길고도 풍성하다. <br>  그는 노모가 젊었을 때 얼마나 웃음이 많았는지, 반면에 눈물 또한 그만큼 흔했는지 알지 못한다. 통통한 볼 살이 빠진 얼굴 위로 주름이 시작될 때까지, 야청빛 머리카락이 희고 성글어질 때까지, 아들의 머리맡에서 도리머리를 흔들던 노모의 많은 밤들을 알지 못한다. <br>  노모는 오래 전 치과 치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마흔이 넘고부터 신 과일을 먹고 나면 양치질을 하기가 영 거북했다. 어쩌다 입으로 찬 바람이라도 들어올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이가 시렸다. <br>  의사는 그녀의 이빨 사진을 보여주면서 딱딱한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아니라고 하자 또다시, 잘 때 이빨을 가느냐고 했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대답하자 고개를 갸웃대던 그는 평소에 이를 악무는 버릇이 있는가, 고 물었다. 노모는 부끄러운 버릇을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말입니다.” 의사는 사진에서 치수가 드러날 만큼 가깝게 법랑질과 상아질이 깨져버린 그녀의 양쪽 어금니 부분을 짚으면서 그렇게 말했다.<br>  “보통은 칫솔질을 너무 과하게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경우엔 이가 이렇게 세모꼴로 부서지지 않아요. 우리 이빨은 이렇게 생겼거든요.” 그는 친절하게도 이빨의 실제 모형을 보여주면서 이뿌리가 드러난 원인을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br>  “이를 악무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리치시는 게 건강에 좋아요. 더 좋은 건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아예 없는 거지만.” 그녀의 서른여덟 개 이빨 중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무려 스물한 개였다. <br>  작고 둥근 얼굴에 안경을 쓴 의사는 나이에 비해 동안(童顔)이었다. 환자들을 치료할 때 튄 오물의 흔적이 그의 안경알에 점점이 남아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평온하고 맑아, 노모는 자칫 “그렇게 하기는 참 쉬워요.”라고 대답할 뻔했었다.<br>  “많이 나빠지셨어요.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밤늦게 회진을 돌던 의사가 따라 나온 남자를 향해 느리게 말을 뱉었다. 노모의 주치의가 이미 퇴근한 뒤라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두세 달마다 한번씩 바뀌곤 하는 레지던트였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노모의 것으로 보이는 차트에 눈을 박은 그의 말씨는 마치, 환자의 병세가 점점 나빠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무심한 어투였다.<br>  “그래도 환자가 혈관이 막혀 출혈하는 경우만 없으면 돌아가실 때까지 큰 고통은 없을 겁니다. 간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다른 병실로 이내 발길을 옮기는 의사의 걸음은 말투만큼이나 느릿느릿했다.<br>  남자는 기어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노모의 침대 밑에 보조침대를 펴고 잠을 청했다. 노모는 웅크리고 잠든 아들을 안쓰럽게 내려다본다. 세상에서 쥐어 박히지나 않을까, 구석진 데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늘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들던 자식이었다. <br>  시어른들이 살아계셨더라면, 그래서 어린 손자를 맡아줄 수 있었다면, 아들을 두고 갈 수 있었을까? 노모는 자문해본다. 그럴 수 없었으리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해온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즈음 본능과도 같이 삶에 대한 욕구가 불쑥불쑥 치밀 때마다 그녀는 과연 그런가, 스스로 되묻곤 했다.<br>  여름이 끝나갈 때쯤 심장병을 앓던 아이의 아버지가 병원 풀밭에서 방아깨비 한 마리를 잡아 왔었다. 제 몸채에 비해 큰 방아깨비의 뒷다리를 모아 쥐면 녹색의 뾰족한 머리를 끄덕이며 놈은 방아를 찧었다. 그 주검이 노모의 머리맡 창틀 위에 무심코 버려져있다. 바깥을 덮었던 초록 외피의 튼튼한 겉날개는 떨어져 나간 채, 속 날개가 몸체에 붙어 조금씩 말라가고 있다. 몸을 떠난 방아깨비의 영혼처럼, 마른 날개가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br><br>  “오늘은 파란 하늘이 티 없이 말갛기만 합니다. 어젯밤엔 베란다 창으로 가을 풀벌레 소리들이 쓰쓰쓰쓰 들려오더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미소리가 어디에든 달라붙을 듯 악착같기만 했는데요. 그 매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 가을이 지나고 나면 어젯밤 제게 푸른 꿈을 선사했던 그 풀벌레들, 풀무치, 여치, 잠자리들의 날개는 또 어디로 갈까요?”  <br>  같은 시간, 남자는 자신의 차에서 그리고 여자는 버스 안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릴 들었다. 가방을 멘 학생들과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열려진 차창 안으로 가로수 길 하얀 은사시나무를 비추던 햇살이 종종걸음으로 몰려들었다. 샴푸 냄새와 여자들의 옅은 지분 냄새가 먼지와 함께 사방으로 투명하게 흩어졌다. 장마로 눅눅했던 것들이 차고 마른 대기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도 같고, 여느 때와는 다른 향기였다. 산이나 들, 초록의 들판에서 시작된 바람이 도시 변두리와 도심의 회색 콘크리트 사이로 끊임없이 불어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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