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 스푼의 무게
전 영 숙
빈 가지에 참새 떼가 우르르 날아듭니다
여전히 빈 가지 입니다 참새 떼를 어디다 다
숨겼는지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고요합니다
들여 놓은 공중의 틈을 조심스레 벌리면
거기, 세상을 들어 올리는 작은 새
쌀 한 스푼의 무게가 나뭇잎 진자리를 누르고
있습니다 지혈을 하 듯 꼭 누르고 있습니다
위잉 울던 바람도 내 안의 상처도 잠잠해집니다
붉게 타올라도 뜨겁지 않은
전 영 숙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어지럽게 머리카락이 빠져 있다
설거지 하고 난 뒤 보면
손톱이 부러져 있다
잘라도 아프지 않은 것이
아프게 한다
붙잡을 수 없는 이 아침처럼
내 몸에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점점 생겨나고 있다는 느낌
나도 모르게 빠져 나온 것을
발견하는 날이 많아질 거란 생각
가을 볕 아래 서 있는 나무를 본다
붉게 타올라도 뜨겁지 않은
단풍잎이 맹렬하게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소리 없이 헐거워지는 공중이다
조금씩 사라지는 내 것 아닌 내 것들
오늘도 이만큼 떠나간다
동백꽃이 피려 할 때
전 영 숙
찌르르 젖이 돈다
둥글게 문질러
아기의 입에 젖을 물린다
동백나무가 공중의 입에
꽃몽우리를 물리 듯
어찌나 세게 빠는지
아기의 이마와 코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꽃몽우리 끝도 피가 몰린 듯 발갛다
쓰리고 화끈거리겠지
속엣 것을 빨아 낼 때
부르르 떨리던 고통
흔들리는 동백나무가
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젖물처럼
터져 나올 꽃잎들
또 공중의 입속은 얼마나 달콤할까
햇빛과 바람에
통통 분 꽃몽우리가 벌어진다
벌과 나비
공중에 속한 것 모두
잠든 아기 배만큼
부르겠다
찌르르 젖이 돈다
동백이 피려 한다
취한 낙타의 시간
전 영 숙
일몰의 사막
낙타가 줄지어 간다
무엇에든 취하지 않고는 건널 수 없는 사막
앞서가는 주인도 뒤따르는 발자국도
모레 한 알까지도
몇 양동이 노을을 들이켜 얼큰하다
해지면 온 동네를 휘저으며
돌아오던 당신
모레가 가득한 입을
퉤퉤거렸지
허리를 꺾어 고단한
사막을 뱉어냈지
적막하다
저무는 풍경의 눈부심이
등짐을 지고 걷는 짐승의 긴 실루엣이
아득한 모레의 길
그 길 다 걸어간 당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몰락의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건네는
아편 같은 생
뿌리칠 수 없게 한다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영화제목 변용
백합과 백합 사이
전 영 숙
작년에 피었던
흰 백합이
올해도 피었다
빛깔도 모양도 향기도
똑 같은데
작년보다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피었다
그 한 뼘 정도의 거리가
별과 별 사이
몇 억 광년의 거리일까
백합이 보여주는
다음 생처럼
이 별을 떠난 당신도
저 별 어디쯤에
피어 있겠구나
새삼
몇 송이 믿음과
꽃 같은 확신을 안고
유심해지면
어머니 밥상에
모여 앉듯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우주의 숨결 속에 모여 앉은
여름 화단이었다
물의 뿌리
전 영 숙
물에 부레옥잠을 심었다
뿌리가 환하게 보였다
몇 잎의 푸른 그늘도 비쳤다
맑고 투명한 근심이 들고
평평하던 표면에
높이와 깊이가 생겼다
딸려온 개구리밥 물달팽이 함께 자라고
꽃과 잎이 피고 졌다
살림냄새가 났다
내 안에 당신을 들인 때처럼
다른 물이 되었다
부드럽고 둥글고 단단한
공기 주머니를 달고
여러 갈래 뿌리를 내리는 물
이제 함부로 흔들리지 않겠다
초대한 적 없는
전 영 숙
달 하나를
삼킨 듯
은밀한 꽃
초대한 적 없는
양귀비가
마당 가득 피어 있다
손 댈 수 없는
저 아름다움은
환각일까
금기는
오히려 매혹적이고
부정 할수록
눈을 뗄 수 없는데
뽑아 버릴까
아무도 모르게
꼭 꼭 숨길까
댕강
모가지를 자를까
늪 같고
뻘 같고
불온 삐라 같은
그림자도 화려한
꽃 속에 묻혀
죄의 칼을 벼린다
달빛도 슬쩍
담장을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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